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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도해도(坐睡渡海圖)

by 걷고

아침에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 만들고 매일 수정했던 원 모양의 일일 생활 계획표가 떠올랐다. 코로나로 인해 오늘부터 5인 이상 모임이 금지되었다. 걷기 동호회 모임도 당분간 중단되었고, 다른 일정은 이미 모두 연기되거나 취소된 상태다. 매년 연말에 약속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애썼던 기억도 있다. 잦은 술자리도 불편하고 차분히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어제 내려진 조치로 자연스럽게 연말 모임을 취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홀로 차분하게 연말을 맞이하고 분주했던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방학이 떠올랐고, 어릴 때 매일 만들고 지우고 다시 만들었던 일일 생활 계획표가 떠올랐다. 아침 식사 후 둥근 원을 그려서 계획표를 만들었다. 아마도 하루 이틀 뒤에 수정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일단 만들어보니 재미도 있고 해 볼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점심 식사 이후에 걷기 위해 한강 공원으로 나갔다. 한강 공원을 걷다가 노을공원 생태 순환길을 걸어서 난지천 공원과 문화 비축기지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약 3시간에 걸쳐 13km 정도 걸었다. 날씨는 푸근하고, 하늘은 맑고, 구름은 무심한 듯 한가로이 떠돌아다닌다. 강물은 세상사와 상관없이 출렁거리고 있고, 물결치는 소리와 바람은 어우러지며 말을 걸어온다. 새들은 나무 위에서 지저귀며 수다를 떨고 있다. 자연은 세상의 일부임에도 세상사와 상관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오직 사람들만 코로나로 인해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며 하루하루 어렵게 버티고 살아가고 있다.


단원의 그림 ‘좌수도해도(坐睡渡海圖)’가 떠올랐다. 달마대사가 풍랑이 심한 바다를 나뭇잎을 타고 건너며 앉아서 졸고 있는 그림이다. 파도가 무서워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들 모습인데, 풍랑 속에서 졸고 있다니 상상조차하기 힘든 일이다. 잠시 혼자 상상의 날개를 피기 시작했다. 어차피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비바람이 불고 풍랑이 심해 배는 뒤집힐 것 같은 상황인데, 졸거나 떨고 있거나 어떤 차이가 있을까? 배가 뒤집혀서 모두 죽거나, 아니면 풍랑이 멈춰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졸은 사람은 항해 기간 내내 편안한 잠을 즐긴 후 목적지에 도착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편안하게 할 일을 할 것이다. 떨고 있던 사람은 여행 내내 불안 속에서 힘들게 지냈을 것이고, 도착 후 심신을 안정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다. 같은 상황에서 대응하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떨고 당황하고 우왕좌왕하는 나의 모습이 그려지며 스스로 쑥스러운 웃음을 짓기도 했다.


장 지오노의 단편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은 상수리 열매 100개를 선별해서 매일 황폐한 산에 심었다. 심지어는 세계대전 와중에도 전쟁이 일어난 사실도 모른 채 열매를 심었다. 전쟁 물자 확보를 위해 주인공이 심었던 나무를 베어가도 그 사실조차도 모른 채 나무를 심었다. 너무나 울창한 숲은 비용 대비 효율성이 떨어져 벌목을 포기하게 만든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할 일을 묵묵히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자서전적 체험 수기를 통해서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을 지켜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수용소에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 치료’를 만들어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주인으로 삶의 주도권을 갖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백신은 언제 확보되고 맞을 수 있을지 오리무중 상태다.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5인 이상 모이지 말라는 지침만 내려졌다. 우리는 모두 그 지침을 잘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 지침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마스크 쓰기. 삼밀 (밀집, 밀접, 밀폐)을 피하고, 손을 자주 씻는 일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활력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다. 일일 시간표를 작성한 중요한 이유도 스스로 무기력하거나 게을러지는 것이 싫어서 자구책으로 만든 것이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 현재 미국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코치로 활동 중인 홍성흔 씨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준 것은 바로 ‘108배를 7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던 루틴’이라고 확신에 차서 얘기했다. 그의 선수 생활 역시 늘 평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루틴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고, 심지어 화장실에 수건을 깔아놓고 108배를 한 적도 있다고 했다. 108배를 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20분 남짓이다. 하루에 20분 정도의 시간으로 하루를 활기차고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 하루가 모여 인생이 된다.


활력과 즐거움은 외부에서 만들어 줄 수도 있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도 중요하다. 그 방법 중 하나가 각자의 루틴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매일 상수리 열매를 100개씩 심는 소설의 주인공과 홍성흔 코치처럼.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있다면 자신만의 루틴을 한번 만들고 실행해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하루에 단 한 가지 루틴을 만들고, 단 10분 만이라도 지켜나가면, 그 루틴이 우리를 지켜주고 활기차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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