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장마가 끝나가고 무더위가 시작됐다. 앞으로도 며칠 더 비가 온다고 한다. 지방 다녀오다 한 선배를 만나 막걸리 한잔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40여 년의 세월을 함께 지내온 선배라서 무슨 얘기를 해도 서로 편안하다. 선배 아들의 결혼 관련 얘기를 들으며 먼저 딸을 출가시킨 경험을 얘기했다. 그 선배는 모친이 약사였다며 전립선 비대증으로 마음이 우울했던 내게 모친에게 들었던 조언을 전달해 주기도 했다. 선배 아들의 결혼 얘기, 내 딸의 둘째 아이 임신, 질병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국 우리가 늙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생로병사는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이 철칙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남은 죽음의 시작이며, 늙음과 병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요즘 늘 하는 말이 있다. “내 몸을 어느 누구에게도 의탁하지 않고 죽고 싶다. 치매에 걸리지 않고 죽고 싶다.” 어느 순간 치매에 걸리거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아내나 외동딸 또는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죽음이 무섭다기보다는, 죽기 전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두렵다.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등록한 이유도 뒤에 남을 가족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미리 준비한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몸은 많이 움직이고, 마음은 평온하게 유지하라.’라는 얘기가 있다.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 점점 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반면에 생각은 많이 하면 할수록 ‘궁리 끝에 악심 온다,’는 말처럼 마음이 어지럽게 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나이 들어가면서 몸은 움직이기 싫어하고, 생각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몸과 마음에 병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걷기와 글쓰기가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며, 인지 능력을 회복시켜주고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비록 늦게 발견하기는 했지만, ‘걷기’와 ‘글쓰기’가 취미가 된 것은 좋은 일이다. 두 가지 취미는 정신 차리고 살고 싶고, 몸을 죽을 때까지 스스로 움직이고 싶어서 생긴 습관일 수도 있다.
손녀를 보며 많은 상념이 일어난다. 손녀는 성장이 너무 늦은데 반해, 나의 늙음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손녀가 하는 모든 경험들은 첫 경험인데 비해, 나의 경험들은 마지막 경험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손녀는 자신의 감정과 불편함을 어떤 상황에서도 표현하는데, 나는 가능하면 감추려고 한다. 손녀는 웃음이 많아지는데, 나는 웃음이 줄어들고 있다. 손녀는 신체적으로 발달하고 건강해지고 있는데, 나는 퇴보하고 쇠약해지고 있다. 나는 손녀처럼 되어가고 있고, 손녀는 나처럼 되어가고 있다. 자연스러운 순환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태도는 오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은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맞이하는 것이다. 태양이 뜨면 아침을 맞이하고, 태양이 지면 밤을 맞이하는 것과 같이. 그런 면에서 ‘몸을 타인에게 의탁하고 싶지 않고, 치매에 걸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 역시 오만한 얘기가 될 수 있다. 희망 사항이 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모든 상황과 사고에 대해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불가능하다. 운전할 때 안전 운전을 하고 안전벨트를 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안전운전과 안전벨트 착용 여부까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지만, 그 외에 더 이상 우리가 준비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나머지는 우리 영역이 아니다.
태어날 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듯이, 죽음도 역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다. 생사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의 영역은 살아있는 동안 살아가는 것이 전부다. 죽음을 준비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고 오늘 하루를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 수는 있다. 인간이 지닌 존엄한 삶의 주도권은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며 현명한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가진 삶의 태도, 가치관, 추구하는 삶의 목적, 하고 싶은 일들이 다르다. 어떤 특정한 삶의 틀을 따른다는 것은 삶의 주도권을 포기하는 일이다. 각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지니님은 어느 날 문득 아침에 일어나 자동적으로 주방을 향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면 어쩌지?’라는 절박감이 불현듯 들었다. 그녀에게 지난 50년의 삶은 주변의 기대와 사회의 이상적인 모델에 맞춰 살려고 스트레스를 받고 지내온 세월이었다. 자신의 삶을 ‘내가 나 자신이 되지 못한 삶’이었다고 단 한 마디로 표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가 죽는다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원래 무슨 일을 하든지 미리 준비를 철저히 하는 편인 그녀였지만, 산티아고 여행은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떠났다. 세부 계획 없이 신발만 걷기 편한 것으로 준비하고 항공권을 구입한 후 출발했다.
그녀는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오로지 걷기에만 집중하고, 자신을 자각하며, 자신에게 집중하고 걸었다. 걸으면면서 자신을 처음으로 느끼며 생전 처음 ‘내가 되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의 중심이 되어 살고 있다는 자유가 주는 기쁨으로 온몸에 자신감과 환희로 가득했다. 충만감에 젖어 ‘나를 살 거야’를 외치며 걸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뭐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답을 찾으며 걸었다. 2017년도 만 쉰 살이 되던 해에 산티아고를 다녀온 그녀는, 여행기 ‘길 위의 안식년’을 발간 후 인문학 독서 모임인 ‘가장자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문학의 밤’ 같은 행사도 열었고, ‘서촌 나들이’ 같은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으며, 여성 비전 센터에서 진로 독서 강사로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오늘 하루를 자신의 주인으로 건강하고 의미 있게 사는 것 외에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날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죽음은 피하거나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웃으며 맞이하는 것이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떻게 살아갈까?’가 될 수 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사라지고, 어둠이 들어오면 빛이 사라진다. 빛과 어둠은 동전의 양면이다. 마찬가지로 죽음과 삶 역시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하루하루 걷고, 명상하고, 글 쓰고, 상담한다.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