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가 우리 집에 같이 머문 지 벌써 7개월째 접어들고 있다. 원래 계획은 3월 초에 어린이 집에 입학하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2월 말까지 돌보기로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계속 연기되고 있다. 덕분에 손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쌓아나가고 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아마 주말에 잠깐 스쳐 지나듯이 보며 아쉬움을 달랬을 것이다. 손녀도 우리 집에서 잘 적응하고 있고, 아내가 24시간 손녀를 정성껏 챙기고 있다. 물론 나도 도와주기는 하지만, 아내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손녀가 잘 따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스스로 평가하며 만족하고 있다.
사위와 딸은 몇 달째 주말 부부로 지내고 있다. 사위는 출퇴근 때문에 회사와 가까운 자기 집에 머물고 있다. 딸은 우리 집에서 출퇴근하며 금요일 퇴근 후 자기 집에 갔다가 일요일 저녁에 다시 우리 집으로 돌아온다. 서울 하늘 아래에 같이 살면서 젊은 부부가 주말 부부로 살아가는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성인이 된 자식의 결정에 부모라고 해도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의 결정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그 결정을 지지하며 도와주는 것이다.
딸이 우리 집에 같이 머물게 되면서 가끔은 딸아이가 결혼 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원 가족만의 정서가 있다.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가족이라는 변하지 않는 믿음이 있기에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지낼 수 있다. 자식의 결혼으로 사위나 며느리가 가족 구성원으로 들어오면서 그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하고, 더욱 끈끈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손주가 태어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가족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한다. 딸이 이제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것이다. ‘우리 딸’은 맞지만,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자연인이고 성인인 ‘딸 아닌 딸’이 된 것이다.
어린아이 한 명을 돌보는 것이 이렇게 많은 노력과 정성과 인내가 필요한 것인지 예전에는 전혀 몰랐었다. 손녀를 돌보며 딸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딸을 평생 안아준 시간보다 손녀를 한 달간 안아준 시간이 더 많아서였다. 또한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딸 돌보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해서였다. 손녀를 돌보며 부모나 조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많이 올라왔다. 아이들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말 대신 울음과 몸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의 사소한 불편함을 빨리 알아차려서 조치를 취해주어야만 한다. 그런 관계 형성으로 인해 부모와 자식 간의 신뢰가 형성되며, 이런 신뢰는 아이의 원만한 대인관계 형성에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딸이 우리 집에 머무는 것이 반드시 편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운동과 친구 모임을 포기하고 손녀에게 매달리고 있고, 나 역시 아내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일정을 조정하거나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딸은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아이 보살피는 방식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를 때에도 자기 방식대로 하지 못하는 불편함도 있을 것이다. 일찍 출근하는 딸을 위해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해주는 엄마에게 고마움과 미안함도 있을 것이다. 가끔 내 심기가 불편할 때에는 괜히 내 눈치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손녀가 생떼를 쓸 때에도 어쩔 줄 몰라 당황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딸은 딸대로 편안할 때도 있고 불편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과 미움, 좋음과 싫음, 편안함과 불편함, 사고방식의 동일함과 차이를 모두 수용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족이다.
딸이 휴가를 냈다. 아침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신문을 보고 있는 딸의 뒷모습을 보며 결혼 전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지금은 직장인으로,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딸로 다양한 역할을 해내며 살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진다. 조금 후에 손녀가 잠에서 깼다. 딸은 방에 들어가 손녀와 같이 누워서 손을 잡고 서로 얼굴을 보고 있다. 둘 다 일어날 생각도 없이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한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손녀는 얼마나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을까? 깨어날 때 엄마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보이고 안아주고 함께 누워 서로 눈 맞춤하는 순간을. 딸 역시 회사 출근할 걱정 없이 손녀와 함께 있는 이 행복한 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려왔을까? 조금 후에 아내도 방에 들어가서 손녀를 가운데 두고 침대에 같이 누워 서로 웃으며 얼굴을 보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내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거실로 나와 딸에게 처음으로 ‘꼭 회사 다녀야겠니?’라고 물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딸, 사위, 손녀의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냥 해본 소리다. 마음속에 실제로 그런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더 이상 얘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다른 뭔가를 추구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 생활하며 살아갈까? 행복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반드시 비싼 집, 좋은 차, 좋은 학교, 좋은 직장, 경제적 부유함, 명품으로 치장한 모습이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을까? 물론 젊기에 패기와 자신만의 꿈과 야망도 있을 것이다. 꿈을 접으라는 말은 아니다.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을 위한 삶인지 한번 돌이켜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꿈과 야망도 실은 행복을 위한 방편 중 하나에 불과하다. 자기실현도 결국 자신만의 행복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 행복을 추구하지만 막연한 파랑새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삶은 이 순간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은 평생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마치 흘러가는 물을 다시는 보거나 느낄 수 없듯이.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부와 명예와 권력과 사치를 추구하며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있는지 않은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구나 욕심이 있다. 건강한 욕심은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욕심은 삶의 동력을 넘어서 욕심 그 자체로 변질될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지위와 위치를 타인과 비교하며 우월한 위치에 서고 싶어 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 봐주길 바라기도 한다. 내면의 가치로 인정받기보다는 무상한 권력, 지위, 부, 명예 등 자신이 가진 것으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우리 모두 이런 욕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런 욕심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고통 속으로 몰아놓고 있는지 알게 될 날이 온다. 욕심을 추구하며 사는 모습이 마치 시시포스(Sisyphus)의 신화를 연상케 한다. 꼭대기까지 무거운 바위를 올려놓으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계속해서 올려야만 하는 시시포스. 원하는 것을 성취한 후에 더 크고, 높고, 많고, 좋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 잠시도 쉬지 못하는 우리네 삶은 시시포스의 삶과 같은 모습이다.
삶의 방식을 변환할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온다. 그 기회를 잘 활용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느냐, 아니면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느냐는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있다. 삶 속에 큰 시련이 올 때가 바로 그 기회이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를 의미한다. 삶의 위험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알려주기 위한 ‘보이지 않는 손’의 선물이다.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삶을 돌아볼 수 있고, 삶의 가치와 방향을 수정할 수 있으며,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겸손을 배울 수 있다. 코로나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의 중요성, 일상적 만남의 고마움, 환경의 중요성, 생필품의 귀함, 홀로 또 함께 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방식 체득, 성숙한 시민의식 등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딸이 손녀와 침대와 같이 누워 손을 잡고 행복한 얼굴로 눈 맞춤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모습을 보며 마음이 짠해진다. 부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살기를 바랄 뿐이다. 한 호흡 들이쉬지 못하거나 마시지 못하면 죽는다는 실상을 빨리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섣부른 충고는 필요 없다. 자식들이 찾아와 고민을 얘기하며 조언을 필요로 할 때를 기다리면 된다. 만약 그런 상황과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한다.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기원한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