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심초심(禪心初心)
날짜와 거리: 20210615 17km
코스: 불광천 – 월드컵공원 – 하늘공원 외
평균 속도: 4.3km
누적거리: 4,182 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집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딸과 두 손주가 우리 집에 며칠 머물기 위해 왔습니다. 네 살이 된 손녀와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손자, 그리고 두 명의 아이들 육아로 지친 딸, 반가운 방문입니다. 아내와 둘이 살던 절 집 같던 조용하고 차분한 집안은 갑자기 장터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정신없이 집안을 어지르며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손녀와 먹고 자고 울고 싸는 손주는 세 명의 어른이 있어도 손이 부족합니다. 오랜만에 집안에 사람이 사는 활력을 느껴봅니다. 딸은 손주를 안고 지내고, 저는 손녀의 친구가 되고, 아내는 정신없이 음식을 사 오고 만들고 집안 정리를 합니다. 어른이 한 명 더 있어도 정신없는 것은 여전할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가족을 느껴봅니다. 손주들은 오면 반갑고, 돌아가면 더욱 반갑다는 얘기를 합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오면 반갑고 정신없습니다. 가면 허전하고 보고 싶습니다. 행복은 인내와 고통 속에 피어납니다. 인내와 고통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욕심일 뿐입니다. 우리네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고통과 역경이 없는 삶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을 겪으며 평온함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역경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세상살이가 녹녹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겸손을 배웁니다.
수요 저녁 걷기 안내하는 날입니다. 불광천에 걷거나 자전거 타거나 운동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하늘은 오랜만에 너무 청명합니다. 늘 답답하게 하늘에 막을 친 미세먼지는 사라졌고, 높고 맑은 하늘만 보입니다. 높은 건물과 하늘은 선명한 선을 그려냅니다. 월드컵 공원을 지나 하늘공원에 올랐습니다. 하늘공원에서 바라보는 월드컵경기장의 푸른 야경은 보석처럼 영롱하고 청정합니다. 보통 야경은 유혹의 불빛이 강한 데 비해 지금 보는 야경은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워 청정 그 자체입니다.
하늘공원의 암흑과 넓은 평원이 만들어 낸 고요함이 모든 상념을 잊게 만들어 줍니다. 그 암흑과 고용함으로 인해 숨이 막힙니다. 마치 태고의 세상을 맞이하는 느낌입니다. 암흑 속으로 들어가 억새풀 사이를 걸었습니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어둠 속 희미한 여백이 보입니다. 강한 바람은 소리를 내며 인사합니다. 억새 밭을 지나 공원 속 대로를 걸으니 마치 산티아고 메세타 평원을 걷는 느낌입니다. 침묵 속에 조용히 길을 걸으며 산티아고 걸었던 추억을 되새김질해 봅니다.
억새 밭을 지나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한강, 성산대교, 가양대교, 지나가는 차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야경을 만들어 냅니다. 등촌동 방향의 낮은 산에는 지그재그로 조성된 조명으로 산을 오르는 길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저 길도 한번 걸어보고 싶습니다. 저녁 9시가 다 되어갑니다. 공원 관리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가와 내려갈 시간이라고 합니다. 저녁 9시에 폐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쪽 계단으로 내려왔는데, 문이 닫혀있습니다. 통나무 문 사이의 좁은 틈을 이용하거나, 낮은 담을 월담하여 넘어왔습니다. 월담은 반드시 도적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월담은 하나의 도전이며 월담이 만들어 낸 스릴감과 긴장감이 있습니다. 그런 긴장감도 살아가는 재미 중 하나입니다.
걷기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잠시 오늘 만났던 친구를 생각합니다. 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는 동료입니다. 그 친구가 상담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들으며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주일학교에서 학생들 지도하던 과정에 도움이 필요한 학생이 있었는데,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안타깝게 생각하다 상담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민의 마음이 상담의 불씨가 된 것입니다. 그 초심으로 상담 공부하고, 상담을 진행하며, 상담이 하나의 소명으로 다가와서 힘들지 않게 공부했고,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며 상담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상담사의 마음가짐이 백 가지 상담 기법이나 전문가 자격증보다 더 중요하고, 상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저는 인생 2막을 준비하기 위한 경제적인 이유로 상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상담할 곳이 없어서 상담 봉사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 상담료를 받을 수 있는 센터에서 상담을 진행했습니다. 요즘은 상담할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나이에 비해 상담 경력이 짧아서 상담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누군가를 돕겠다는 초심이 없어서였습니다. 남을 돕겠다는 마음을 가진 자와 돈을 벌겠다는 마음을 가진 자는 같은 상담을 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상담사이지만, 실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상담사입니다. 기준과 초점이 내담자에게 있는가, 자신에게 있는가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어떤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 내담자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에 큰 차이가 있게 되고, 그런 차이는 상담의 질을 결정하게 됩니다. 상담의 질은 바로 내담자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큰 깨달음을 친구 덕분에 얻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상담을 통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한다면, 더 이상 유료 상담센터에서 근무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기에 마지못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제는 올바른 상담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초심을 배우고 익히며 유지하려 합니다.
‘선심초심(禪心初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초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참선 공부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 즉 초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공부하는 과정에 수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그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바로 초심 때문입니다. 초심 자체가 공부의 기둥이며 기준입니다. 처음 애인을 만날 때의 설레는 마음, 처음 책의 첫 장을 펼칠 때의 기대감, 처음 참선에 임할 때의 굳건함, 처음 맛보는 음식에 대한 즐거움, 처음 길을 걸을 때의 충만감, 처음 예불 모실 때의 경건함이 모두 초심입니다. 저는 이제야 초심을 알게 된 초보 상담사가 되었습니다. 좋은 친구 덕분입니다. 그 친구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저의 초심을 지금부터라도 찾고, 알고, 유지하며 상담사로 살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