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길은 궁금함이다
날짜와 거리: 20220331 18km
코스: 오대산 선재길
평균 속도: n/a
누적거리: 6.449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천년 사찰 옛길을 걷고 싶다. 사찰마다 예전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옛길이 있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옛길은 끊어지고 새로 생긴 도로에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섞여 다니고 있다. 몇 년 전에 해남 미황사에 머물며 옛길을 걸었던 적이 있다. 약 3km 정도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오른쪽에는 바다가 보이고 왼쪽에는 달마산이 우뚝 서있고, 옛길은 마치 원시림처럼 적막하다. 그 길이 정비되어 지금은 달마고도길로 다시 태어났다. 사찰 옛길을 걸으며 성찰과 침묵의 시간도 보내고 싶고, 사찰과 인연 있는 스님들과 신도들의 얘기도 듣고 싶다. 그리고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해서 많은 사람들이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길 희망한다.
첫 프로젝트로 오대산 선재길을 택해서 다녀왔다. 선재동자는 53인의 선지식을 찾아 구도하는 구도자로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이름이다. 이 길이 선재길로 명명된 이유는 분명하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오대산 적멸보궁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번뇌를 내려놓고 선재길을 걸으며 불법을 구하고, 마지막에는 적멸보궁에 안치된 진신사리를 친견하며 깨달음을 얻으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길이 만들어진 이유는 길마다 다르다. 이곳에서 저곳을 연결해 주기도 하고, 장소의 연결은 사람의 연결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길은 만들어졌다 사라지며 무상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선재길은 구도의 길이다. 구도자를 위해 만들어진 길이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구도자가 된다. 구도에 마음이 없는 사람들도 이 길을 걸으며 바깥세상의 모든 고민과 번뇌를 내려놓게 된다. 적멸보궁에 오르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매 걸음마다 고민과 한숨과 고통을 하나씩 내려놓게 된다. 산 구석에 홀로 주리를 틀고 앉아있는 것이 구도가 아니다. 고통과 번뇌를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것이 구도이다.
선재길은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연결된 길이다. 상원사에 도착 후 마음을 챙기며 적멸보궁으로 오르게 된다. 상원자 주차장에 현수막이 걸려있다. 월정사 단기 출가자 63회 차 모집 공고문이다. 5회 차인 2005년도에 단기출가를 다녀왔다.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반갑다. 한 달 동안 사찰에 머물며 행자 생활을 하는 단기출가는 한번쯤 권하고 싶은 프로그램이다. 월정사와 상원사는 모두 적멸보궁을 지원하기 위한 사찰이다. 따라서 월정사에서 이런 의미 있는 수행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함께 공부했던 단기 출가자 중 10% 정도가 실제로 출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많은 분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수행의 맛도 느끼고 일상 속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길 기원한다.
함께 간 길동무 중 한 분과 잠시 얘기를 나눴다. 그분은 가톨릭 신자로 가톨릭에서 진행하는 한 달 수행 프로그램에 두 번 참석하셨다고 한다. 다른 분의 말씀을 들으니 신심이 깊지 않으면 마치기 힘든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프로그램 이름을 들었지만, 생소한 단어라서 기억하지 못해 아쉽다. “나는 2005년에 무척 힘들어서 살기 위해 단기출가를 했는데, 어떤 이유로 수행 프로그램에 그것도 두 번이나 참석을 했나요?” 2005년 단기출가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암흑 속에 살고 있던 시기였다. 미래는 보이지 않고, 깜깜한 동굴 속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단기출가 마치고 나오니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기억이 생각나서 물어봤던 것이다. “궁금해서요, 심심해서요.” 그 답이 계속 마음속에 남는다.
선재길은 약 10년 전쯤에 걸었는데, 길이 지금보다 짧았고 편안했다. 그때는 월정사에서 상원사 방향으로 걸었다. 이번에는 상원사 - 적멸보궁 - 상원사 - 선재길 - 월정사 코스로 다녀왔다. 길이 조금 험하고 발목을 다칠 위험이 많은 정도로 돌길이다. 택시 기사에게 들으니 몇 년 전 태풍으로 길이 유실되어 아직 채 정비가 마무리되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의 선재길은 차가 다니는 도로 건너편의 산책길이었다. 도로와 산책로 사이에는 넓은 개울물이 큰 소리는 내며 흘러서 차 소음을 거의 들을 수 없는 편안하고 조용한 길이었다. 지금은 개울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여러 곳에 만들어서 양쪽 길을 넘나들으며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한 덕분에 거리도 많이 늘어났다. 산속에는 아직도 얼음폭포와 쌓여있는 눈도 볼 수 있었다. 서설(瑞雪)이 뿌리며 상서로운 기운을 나눠준다. 적멸보궁의 상서로운 기운과 부처님의 가피로 편안한 삶을 살아가라는 따뜻한 배려이다. 넓은 개울에 흐르는 힘찬 물소리와 개울가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개구리들이 봄소식을 알려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동무가 얘기했던 ‘궁금해서’라는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쑥스러워 그런 말을 했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들었다. 무엇이 궁금해서 수행처에 들어가 한 달씩 수행을 하며 지냈을까? 그것도 두 번씩이나. 나는 왜 한 달간 단기출가에 동참했을까? 그리고 무엇을 얻었을까? 단기출가 다녀온 지 17년이나 지났지만,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함께 걷는 길동무에게 얘기하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느낄 수 있었다. 17년 전보다 지금은 많이 편해졌다는 것을.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단기출가가 준 선물일 수도 있고, 단기 출가 후 여러 가지 노력을 하며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다.
‘굼긍해서’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가 떠올랐다. 죽음을 맞이하는 말기 환자들의 심리상태 변화 과정을 정리한 단계로 부정, 분노, 협상이나 타협, 우울,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수용의 과정이다. 삶 속의 고통을 맞이하는 과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삶 속에서 고통스러운 상황을 맞이하면 처음에는 부정하고 분노한다. 주어진 힘든 상황을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상황과 상황을 만들어 낸 모든 사람들에 대해 분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다음 단계로 외부로 쏟아냈던 불평과 분노를 자신에게 돌리기 시작한다. 타협과 우울의 시간이다. 이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성찰하며 참 자기와의 만남을 시작한다. 그리고 삶을 수용하기 시작한다.
삶을 수용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인가?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는 존재의 실체는 무엇일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답답함을 느낀다. 마치 화두 참선하는 수행자가 앞뒤로 꽉 막힌 상태에서 단 한 발도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답답함처럼. 길동무가 ‘궁금하다’고 얘기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 궁금함은 삶의 실체를 회피하지 않고 파악하기 위해 정면 대결하는 용맹심이다. 궁금함과 나 자신이 서로 단 한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맞서고 있다. 언젠가 둘 중 하나는 떨어져 나갈 것이다. 지금부터는 인내의 시간과 답을 구하는 끊임없는 노력만이 필요하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기고 지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의지에 달려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상황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결코 쉬운 과정도 아니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에는 틀림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탓’하는 것이 아니고, ‘덕분’에 이런 단계에 와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인내와 간단없는 노력을 하는 것 밖에 없다. 삶의 고통은 삶의 큰 선물이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부처님께서도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라고 말씀하셨다. 번뇌를 바탕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재길을 걸으며 모두 선재동자가 되었다. 적멸보궁에 참배하며 부처가 되겠다는 발원도 했다. 길동무들과 걸으며 모두 도반이 되었다. ‘궁금하다’는 말 한마디 듣기 위해 우리는 이 길을 걸었다. 참 귀한 인연이다. 선재길은 ‘궁금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