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블루
날짜와 거리: 20220502 - 20220504 27km
코스: 인왕산 둘레길 외
평균 속도: 2.4km/h
누적거리: 6.711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5년 전 산티아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길동무와 친구가 되어 지금도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평상시 독실한 불자이셨던 모친의 49재 초재를 마친 그 친구가 연락 와서 둘이 인왕산 둘레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모친께서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시면서 한동안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오늘 만나니 편안하게 보내드린 것 같은 안도감과 평온함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했다. 고인은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다. 저 세상으로 가신 분을 못 가시게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너무 마음 아파하면 영가도 역시 쉽게 이승의 인연을 끊어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 그 친구의 모습에서 모친을 여한 없이 보내드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덕분에 둘이 만나면 지금도 계속해서 산티아고 얘기를 하며 서로 웃는다. 그만큼 산티아고가 준 영향이 크다. 만나게 된 과정, 만나며 함께 와인이나 맥주를 마셨던 추억, 사진을 찍기 위해 쇠로 만든 무거운 허리띠를 둘러메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친구의 모습도 떠오르고, 까미노에서 만난 사람들 얘기도 하며 서로의 추억을 공유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까미노 블루’ 얘기를 한다. 산티아고를 다녀온 사람들이 수년 이내에 겪는 산티아고 길에 대한 일종의 향수병이다. 병에 걸릴 만큼 산티아고의 추억과 경험은 강렬하다. 그 친구는 ‘왜 걷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찾은 것 같다고 한다. “다녀온 후에 신체적으로 변했다. 걷기를 별로 하지 않았던 몸이 다녀온 후에 걷기에 최적화되었다. 심리적으로는 여유롭고 편안해졌다.”라고 말하는 얘기를 들으며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온 후 즉시 답을 찾은 것이 아니고 5년이 지난 지금에 찾은 것은 숙성의 기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몸이 먼저 체득한 후에 마음과 생각이 체득한 것을 알아내는 기간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경험은 완전히 나의 것이 된다. 그 경험은 ‘까미노 블루’를 만들어내고, 지금까지 체득한 경험의 단계를 넘어서기 위한 다음 단계를 준비한다. 굳이 단계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탐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 단어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경험이 누적되며 나선형의 성장과 성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걷기 동호회 회원 한 분을 만나서 함께 걸었다. 지금까지 산티아고를 서너 번 다녀오신 그분은 최근에 다시 한번 산티아고를 다녀오셨다고 하며 포르투갈 길을 추천해주셨다. 약 6개월 전부터 길에 대한 갈증이 시작되었고, 히말라야 트레킹을 갈까, 영국의 소금길을 갈까 하며 고민 중에 있었는데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갑자기 ‘까미노 블루’가 찾아온 것이다. 오늘 만난 친구는 예전부터 ‘까미노 블루’ 얘기를 하며 다시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5년 전에 부친을 여읜 후에 산티아고를 다녀왔고, 얼마 전 모친을 여읜 지금 다시 산티아고 길을 가고 싶다고 한다. 은의 길, 포르투갈 루트, 그리고 북쪽 해안 루트를 고려 중에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언제 출발할지 결정된 것은 없지만, 이미 마음속에는 '까미노 블루'에서 벗어나기 위해 까미노를 가야겠다는 생각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그 친구와 함께 포르투갈 길을 걷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걷기 동호회 회원 중에 산티아고를 가고 싶어 하는 분들과 함께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미 한번 다녀왔기에 어떻게 ‘따로 또 함께’ 걷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방법을 알고 있어서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지난번 산티아고 다녀올 때 함께 갔던 친구와 중간에 헤어졌고 결과적으로 길동무 한 명을 잃게 되었는데, 그 후회와 마음의 빚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 마음의 빚을 이번 기회에 깔끔하게 청산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5년 전에 걸을 때에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걷는 일에만 집중하느라 제대로 걷는 것을 즐기지도 못했고, 다른 순례자들과의 대화를 일부러 피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그렇게 걸었다. 오직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걸었다. 물론 목적은 달성했지만, 걷는 것의 목적이 도착지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굳이 걸을 필요가 없다. 교통편을 이용하면 쉽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고 무언가에 쫓기듯 걸었다. 하지만 다시 산티아고 길을 걸을 기회가 온다면 이번에는 여유롭게 걷고 싶다. 주변 경치도 즐기고, 걷는 것 자체도 즐기고, 외국인들과 대화도 나누고, 음식도 즐기며 한가롭고 여유롭게 걷고 싶다. 포르투갈 루트는 난이도가 프랑스 루트보다 낮고, 거리도 약 200km 정도 짧고, 기간도 출발에서 귀국까지 한 달 정도면 가능하고, 물가가 스페인보다 싸서 여행 경비도 덜 들 것 같다.
나이 들어가면서 친구들과 모임의 숫자는 줄어들고, 에너지와 시간은 점점 소멸되어 가고 있고, 하고 싶은 일 역시 줄어들고 있다. 그럼에도 걷기와 글쓰기라는 두 친구를 늦게 만나게 되어 삶의 재미와 열정은 사드라 들지 않고 있어서 다행이다. 오늘 친구와 ‘죽음’에 대한 얘기도 나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죽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활기차게 걸을 수 있는 나이를 칠십으로 여긴다면, 앞으로 걸을 수 있는 기간은 불과 6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여한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둘이 합의를 했다. 굳이 버킷 리스트까지는 필요 없다고 해도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고 싶다. 걷기와 글쓰기가 하고 싶은 일이다. 산티아고 걷기, 코리아 둘레길 걷기, 지리산 둘레길 남은 구간 걷기, 제주 올레길 걷기, 경기 둘레길 걷기 정도를 모두 마치려면 5, 6년 정도 걸릴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집 주변이나 서울 내 걸을 만한 곳을 걸으며 건강을 유지하며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걷고의 걷기 학교’를 운영하고, ‘걷고의 걷기 일기’ 한 권 정도는 발간하고 싶다. 명상, 심리상담, 독서도 생활이자 할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은 나의 삶을 충실하게 만들어 주며 함께 나눌 수 있는 일들이다. 이 정도면 죽을 때 여한 없이 살았다고 웃으며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