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의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다

by 걷고

지리산 둘레길을 함께 가기로 약속한 길동무들과 서울 둘레길을 함께 걸었다. 오늘 코스는 창포원에서 당고개역까지 약 8km 정도로 3시간 30분에 걸쳐 걸었다. 서로 오랜 기간 알고 지내왔지만 최근에 길을 함께 걸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고 있다. 걷는 습관과 속도도 확인하고, 장비 구입 및 정비에 관한 얘기도 하고, 지리산 둘레길 참석하는 각자의 일정 등을 얘기하며 즐겁게 걸었다. 길을 걷고 얘기를 나누며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며 우정을 쌓아간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요즘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평생 같이 갈 친구들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일이 쉽지도 않지만, 굳이 새로운 사람과 인연을 맺으며 시행착오 등으로 인한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로를 잘 알고 있기에 어떤 언행을 해도 이해할 수도 있고, 서로 포용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한계의 선도 분명하게 알고 있고, 어제의 불편함이 오늘까지 연결되지 않는 편안함도 있다.


창포원에서 만나 차 한잔 마시며 얘기를 나누다 깜짝 놀랐다. 한 사람의 일정이 내가 이해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기차표도 취소해야 하고, 민박 예약도 변경해야 한다. 다소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것은 별 문제는 아니다. 놀란 이유는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말만 들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오랜 기간 알고 지내왔고 충분히 많은 얘기를 나누며 서로 이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상이몽처럼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길을 걸으며 이 일이 자꾸 떠올랐다. 과연 나는 사람들의 말에 경청하고 있는가? 나의 판단과 주관, 평가를 내려놓고 온전히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정성스럽게 듣고 있는가? 의사를 전달할 때 상대방이 잘 이해할 수 있게끔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상담사로서 이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비록 상담 장면이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온전히 상대방의 말을 듣는 태도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쩌면 경청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의 의무라는 생각도 든다.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 수도 있다. 많이 듣고 적게 얘기하라는 의미이다. 지리산 둘레길 준비를 하며 좋은 교훈을 얻게 되어 다행스럽고 고맙다. 세 명 이상이 길을 가면 반드시 그 안에 스승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올바른 뜻을 오늘 제대로 알게 되었다. 스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가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바로 볼 수 있으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인적도 별로 없는 고요한 창포원은 포근했다. 창포원에서 바라본 도봉산, 수락산의 모습과 청명한 하늘을 보니 마음이 시원해진다. 서울 둘레길 출발점인 창포원에서 수락산 길로 접어들었다. 여러 번 왔던 길이지만, 계절과 날씨에 따라, 또 누구와 함께 걷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길이 되기도 한다. 편안한 길동무들과 걷는 길은 아무리 험해도 힘들다기보다는 즐겁고 발걸음도 가볍다. 설사 힘이 들어도 함께 걷는다는 편안함이 힘을 북돋워준다. 그 힘으로 또 가볍게 걷게 된다. 홀로 취미 활동을 하는 것보다 수다를 떨며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에 신문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나 나이 들어가면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외로움이 마음을 병들게 한다. 길동무는 이런 면에서 매우 탁월한 치유 효과를 지니고 있다. 준비해 간 음식도 나눠 먹고, 길과 연관된 추억도 상기하고, 길가에 피어난 꽃과 작물들을 보며 자신의 일상과 연결점을 찾기도 한다. 사소한 얘기를 하고 들으며 크게 웃기도 한다. 길이 있어서 걸울 수 있고, 원하는 곳으로 이동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한다. 길이 없으면, 또는 끊기면 우리는 고립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길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통해서 사랑과 믿음이라는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런 면에서 길은 사랑이고 믿음이다.


한 사람이 전망대 부근에서 돌로 탑을 쌓고 있었다. 주변에 열 개 이상의 탑들이 쌓여있다. 아무런 도구 없이 맨손으로 쌓아 올린 탑을 자세히 보니 돌과 돌 사이에 물기와 흙이 엉켜서 탑이 무너지지 않게 버텨주고 있다. 오랜 기간 쌓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이 사람은 이곳에서 탑을 쌓고 있을까?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산에서 탑을 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궁금하지만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닐 수도 있다. 길동무 한 분이 그분에게 간단한 간식거리를 전했고, 그분은 그 보시에 고맙다고 화답했다. 흩어져있던 돌들이 탑이 되어 하나기 되듯, 몰랐던 길동무와 탑을 쌓는 사람이 나눔을 통해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가진 것을 나누고, 고통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라는 기도를 하고, 힘들어도 살아야만 한다고 말 없는 말을 전하고,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살만한 세상이다. 그분이 간절히 발원하는 모든 일들이 원만 성취되길 기원한다.


모두 환갑이 넘은 길동무들은 통나무로 만든 나무 사이 간격을 통과하며 자신의 허리 사이즈가 30대라고 좋아라 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어린애가 된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속담이나 격언 또는 전해져 내려온 말들은 그 말이 나온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 근거는 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나왔을 것이다. ‘죽기 전에 철들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다. 오늘 길동무들이 하는 언행을 보니 이 말도 맞다. 절대로 이들의 철든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60대 중반인 사람들의 행동이나 습관이 앞으로 바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오늘 통나무를 목숨 걸고 통과하고, 스스로 큰 일 했다는 듯 장한 표정을 짓는 모습과 이를 지켜보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모두 어린아이가 되어가고 있다. 이미 철들기는 글렀다.


뒤풀이 식사를 하며 우리는 하나의 습관을 만들기로 했다. 걷기 습관이다. 꾸준히 걸은 친구도 있고, 그렇지 않은 친구도 있다. 앞으로 꾸준히 걷기 위해 어제 등산화와 등산복을 구입한 길동무도 있다. 격주로 토요일과 금요일에 걷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매주 한 번은 걷게 되고 만나게 된다. 얼굴도 보고, 운동도 하고, 수다도 떨고, 맛있는 음식도 먹는 좋은 놀이다. 철들지 않았기에 철들기 전에 최대한 즐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 만나서 함께 걷고 즐겁게 지내지 못하면 앞으로 그럴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노화로 인한 다양한 신체 증상이 우리의 놀이를 방해할 것이다. 방해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고 지금 이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우리는 이렇게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어린애가 되어간다. 우리의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다. (2021년 9월 9일)

%EC%B0%BD%ED%8F%AC%EC%9B%90.jpg?type=w580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걷기는 삶의 잡철을 제거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