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수많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좋은 상황도 있고 나쁜 상황도 있다. 또한 마치 새옹지마처럼 좋은 상황이 나쁜 상황으로 변하기도 하고, 그 반대 상황이 되기도 한다. 산을 오르면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듯이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살아가는데 굴곡이 없다면 잠시 편안함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 편안함이 무료함으로 변해서 고통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일상 속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를 발생시키는 상황인 스트레스원(源)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상황을 해석하는 주관적인 판단 때문에 발생한다고 스트레스 전문가는 얘기한다. 주관적인 해석은 결국 자신 내부에 저장된 수많은 경험과 감정, 느낌, 인식 등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 발생한 사건을 저장된 자료를 바탕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저장된 자료를 불교에서는 제8 식인 아뢰야식이라고 한다. 불교의 수행은 아뢰야식을 비워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
명상을 하면 심층 의식에 머물러있던 내용물이 떠오른다. 심층 의식이 표층의식으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심층의식이 바로 아뢰야식이고, 떠오른 표층 의식을 흘려보내는 작업이 바로 명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명상을 한다고 앉아서 떠오른 생각을 붙잡거나 생각에 끌려다니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도 한다. 따라서 올라온 생각에 머물지 않고 흘려보내기 위해 또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어야 알아차릴 수 있고, 알아차린 상태를 계속해서 집중하며 유지해야 한다. 이 표층 의식을 흘려보내면 하나의 식(識)이 사라지게 된다. 생각주머니라고 할 수 있는 아뢰야식 속의 내용물 중 한 개가 없어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주머니 속에 있는 내용물을 하나하나씩 없애는 작업이 바로 명상이고 수행이다.
내용물이 없어진다는 것은 지금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할 근거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판단 기준이 사라지면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바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다. 주관적인 경험과 사고가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생각주머니가 빈 상태에서 받아들이기에 주관이 들어갈 공간이 사라져 버린다. 주관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저절로 드러난다. 주관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주어진 어떤 상황도 자신을 괴롭게 만들 수 없다. 괴로움과 즐거움 양극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추우면 춥다고 느끼고 더우면 덥다고 느낄 뿐이다. 춥기 때문에 괴롭고 화가 나거나 짜증이 올라오지 않는다. 추위는 그냥 추위일 뿐이다. 계절의 변화를 수용하면 된다. 따라서 줍거나 더울 수는 있어도 이로 인한 되면 고통은 없다. 그냥 추울 뿐이고 더울 뿐이다.
삶의 굴곡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삶이나 환경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주관적인 판단, 즉 과거의 경험이 바탕이 된 판단을 잣대로 활용할 경우에는 그 판단과 어긋날 경우 불편하고 화가 날 수도 있다. 주어진 상황을 자신의 주관이라는 프레임으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황을 만나면 기뻐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화를 내기도 한다. 주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관의 근거는 바로 과거 경험과 의식인 생각주머니다. 이 생각주머니가 그 안의 내용물로 '지금-여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이는 모두 허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과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이 바로 자신이라는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허상에 속아 다시 한번 귀신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자신의 프레임으로 재단할 경우 저항이 발생한다. 바로 스트레스다. 저항을 줄이면 스트레스는 저절로 사라진다. 저항의 근본 원인은 상황이 아니고 자신의 생각주머니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마주친 상황과 사람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고통의 원인을 외부 요인으로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마다 대처하는 방법과 느끼는 감정과 사고하는 방법이 매우 다르다. 그 이유는 바로 각자의 생각주머니 속 내용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삶의 저항은 주어진 상황이 만든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생각주머니, 즉 스스로 만든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것 중 하나가 바로 ‘통제’와 ‘권위’였다. 누군가가 나를 통제한다거나 권위적으로 대하면 참기 어려웠다. 아직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많이 옅어진 것 같아 그나마 다행스럽다. 그럼에도 가끔 이런 상황을 마주치면 여전히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올라오는 분노를 예전보다 빨리 알아차릴 수 있게 되어 분노의 불꽃이 더 강하게 올라오기 전에 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이유를 고인이 되신 아버지에게서 찾았다. 아버지의 권위적이고 통제적이고 폭력적인 언행이 주눅 들게 만들었고, 성장하면서 강한 저항감을 만들어 낸 것 같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이라고 자신을 변호하는 것은 매우 비겁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의 원인은 아버지일 수는 있겠지만, 그 이후에는 스스로 노력이 부족했고, 빨리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 오히려 더 클 수 있다. 누구나 힘든 상황을 맞이하며 살아간다. 그 상황을 자신의 동력을 만드느냐, 아니면 상황의 무게에 눌려 비겁하게 핑계를 대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이 결정된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현재 주어진 상황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과거가 된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과거의 생각주머니는 명상을 통해서 비워 나갈 수 있다. 현재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삶의 저항을 줄일 수 있다. 저항을 줄인 만큼 생각주머니에 들어갈 내용물은 줄어든다. 따라서 미래의 자신은 과거의 업이 만들어 나가는 자신과 결별하게 되고 새로운 자신으로 탄생하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다시 태어난다. 삶의 저항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의 끈이다. 저항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볼 수 있다. 과거의 모습은 생각주머니가 만든 자신이다. 그 저항을 피하거나 습관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저항 속 이면을 들여다보며 직면을 통해서 생각주머니의 내용물을 들여다보고 흘려보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저항하는 것은 생각주머니를 채우는 일이고, 내용물을 들여다보는 것은 생각주머니를 비우는 일이다. 생각주머니가 가벼워질수록 저항은 줄어들고 삶이 편안해진다. 삶의 저항을 통해서 삶의 편안함을 회복할 수 있다. 번뇌가 바로 깨달음이 되는 순간이다. 길을 걸으며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을 알아차리고 흘려보내며 명상을 한다. 걷기 명상이다. 걷기를 통해 깨달음에 이를 수 있고 삶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