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달마고도는 자발적 유폐다

by 걷고

미황사와는 오래전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다. ‘참 사람의 향기’라는 7박 8일 참선 수행 프로그램에 참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가끔 내려가서 쉬었다 오곤 했었다. 그 당시 주지 스님이셨던 금강스님과는 가끔 차담을 나누기도 했었다. 주지 스님의 넓은 품과 미황사의 평온 속에서 며칠 쉬었다 오며 삶의 활력을 되찾기도 했었다. 달마고도길이 채 조성되기 이전이어서 사찰에서 너덜까지 매일 아침 산책을 하고, 그 넘어 천년 숲길을 홀로 조용히 산책했던 기억도 있다. 숲길을 걷는 내내 겨우 한 두 사람정도 만날 정도로 인적이 드문 한적한 산책길이었다. 그 길이 이제는 확장되고 연결되어 달마고도라는 멋진 길로 2017년에 태어났다. 스님과 마을 사람들이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손과 땀으로 만들어 낸 길이다. 이 길의 탄생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세월을 땀으로 견뎌내는 수고를 감수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며 걷기에 편안한 길을 만들어 낸 그들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 길이 열린 후 바로 찾아오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오지 못했고 어제 비로소 걸을 수 있었다. 이 길에 대한 사랑 덕분에 이 길을 한껏 즐기며 걸을 수 있었다.


무박 2일 일정으로 전날 밤 11시에 출발해서 새벽 4시경 해남에 도착 후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미황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5시. 아직 어둠이 가득한 시간이다. 마침 새벽을 깨우는 범종 소리가 산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 범종 소리는 사람들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시끌벅적한 소음으로 쉽게 종적을 감춘다. 범종 소리는 십리를 간다고 한다. 은은히 퍼져 나오는 그 깊은 소리를 감상하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조금 일찍 왔더라면 사물(四物)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을 텐데. 범종, 법고, 운판, 목어는 불교 사찰에서 사용하는 악기로 사물이라고 한다. 미황사의 새벽과 저녁은 사물소리로 시작해서 사물소리로 마무리된다. 스님이 가사장삼을 늘어뜨린 채 법고를 치는 그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예술이다. 새벽을 깨우는 사물소리는 중생의 마음을 깨우는 소리고 저녁에 울리는 사물소리는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는 법음이다.


그간 마음에 품었던 이 길을 걷는다는 생각에 설렘과 긴장감을 느낀다. 마치 오랜 세월을 기다린 후 연인을 만나는 느낌이다. 하지만 연인인 달마고도는 결국 자신의 속내를 모두 보여주지 않으며 다음 만남 약속을 재촉한다. 이 길은 걷는 내내 저 멀리 산 넘어 보이는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는 멋진 길이다. 하지만 구름에 감춰진 바다는 다급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음 만남을 약속하라고 조용히 타이른다. 다음 만남의 기대감을 더욱 끌어올리기 위해 달마고도는 나와 밀당을 하고 있다. 그런 밀당이 오히려 반갑고 고맙다. 그녀 역시 나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의미다. 내게 미황사와 달마고도 그리고 도솔암은 영원한 연인이자 사랑이다.

스틱.jpg

늦은 밤에 출발해서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인 새벽에 헤드랜턴을 밝히며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왜 이들은 이 힘든 고생을 사서하고 있을까? 회사에서 돈을 더 주며 야간 근무를 하라고 해도 거부하는 이들이 왜 힘들게 번 돈을 기꺼이 지불하며 주말에도 쉬지 않고 먼 이곳까지 와서 힘들게 길을 걸을까? 미황사 주차장에는 우리 외에도 대형 버스 세 대나 미리 와서 수많은 사람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들은 왜 그럴까? 왜 힘들게 밤잠을 설치며 사서 이 고생을 할까? 그들 모습에서 지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목소리는 밝고, 온몸에는 활력이 넘친다. 전날 밤 버스에 오르기 전에는 모두 지쳐있었을 것이다. 일주일 내내 격무에 시달리고, 집안일에 지치고, 각자 맡은 책임감과 부담감에 어깨는 무겁고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항사 주차장에 도착한 이들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을 정도로 활기가 넘쳐난다. 왜? 왜? 왜?


‘유폐’의 사전적 의미는 ‘아주 깊숙이 가두어 둠’이다. 이 길을 생각하며 갑자기 ‘유폐’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유폐에는 수동적 유폐와 능동적 유폐가 있다. 수동적 유폐는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강요된 상황이다. 반편 능동적 유폐는 스스로 자신을 위해 자신을 가두는 자발적 유폐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자신을 사회와 가정에서 격리시키며 세속에 지친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 자발적 유폐를 한다. 수행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자발적 유폐를 한다. 성철스님은 당신이 머물렀던 암자 주변에 철조망까지 치며 철저히 자신을 외부로부터 유폐시켰다. 불교 수행 전통에는 무문관이라는 제도가 있다. 수행자가 방안에 들어가면 외부에서 방문을 잠그고 좁은 구멍으로 밥만 밀어 넣어준다. 스스로 그 방을 찾아 들어가서 자발적 유폐를 감행하며 수행에만 전념한다. 자발적 유폐는 자신을 깨고 너와 나의 벽을 허물고 사랑을 베푸는 아름다운 행위다.


그렇다. 새벽부터 이 길을 찾아온 이들은 모두 자발적 유폐를 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지친 심신을 회복시키며 다시 가정과 사회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를 묵묵히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온 것이다. 서울에서 아주 먼 해남까지 밤잠을 거의 못 자며 내려와서 쉴 틈도 없이 바로 어둠을 뚫고 달마고도를 걷는다. 길을 걸으면 자연이 우리를 감싸준다. 어둠과 햇살이 우리를 감싸준다. 길이 우리를 반기고, 바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며, 아름다운 경치가 우리를 반겨준다. 말없는 위로가 참다운 위로가 되어 지친 심신을 달래준다. 함께 걸은 길동무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서로 반기는 따뜻한 마음이 세상 시름을 잊게 만든다. 그렇다. 달마고도는 자발적 유폐의 길이다. 따라서 슬픈 길이기도 하고 희망의 길이기도 하고 치유의 길이기도 한다. 달마도고의 백미는 도솔암이다. 도솔암을 짓기 위해 자발적 유폐를 한 수행자 덕분에 우리는 도솔암에서 참배하며 무문관의 문을 부수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다. 같은 ‘나’이지만, 자발적 유폐를 한 나는 이미 이전의 ‘나’가 아니다. 달마도고는 자발적 유폐다.

도솔암.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고통의 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