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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Jan 28. 2024

깨달음 그리고 지혜 (레스터레븐슨 저)

 며칠에 걸쳐 책 ‘깨달음 그리고 지혜’를 완독 했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이 편안하다. 마음공부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정리된 느낌이 든다. 많은 스승들, 또는 그분들이 쓴 책은 결국 모두 한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같은 말을 여러 표현을 사용해서 설명한다. 듣는 사람이 워낙 다양해서 한 가지 설명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스승님의 말씀이 다르게 들릴 수도 있다. 부처님 말씀인 법음(法音)은 한 가지를 말씀하시지만, 듣는 사람에 따라 각자 자신의 상황에 맞게 듣는다고 한다. 한 가지 꽃이 만 가지 향기를 풍긴다.  

   

 며칠 전 친구 모임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중 한 친구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거슬렸다. 나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 친구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그렇게 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는 그가 나를 무시하는 태도로 대한 것을 내가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모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많이 불편했다. 마침 이 책을 읽고 있는 중이어서 불편한 마음을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그 친구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다음 단계로 왜 그런 마음이 떠올랐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대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별로 없지만(아니다. 늘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 최소한 무시하는 태도로 나를 대하는 것은 싫었다. 내 안의 에고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에고는 ‘거짓 나’다. 그 ‘거짓 나’에 속아 화가 난 것이다. 그다음 단계로 에고를 바라보는 주시자가 되어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불편함은 남아있었지만, 대신 그 친구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불편함을 안고 어떤 판단이나 해석도 내리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았다. 그 이후에 내가 그 친구를 무시하고 있는 투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그를 무시하고 있는데,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그가 나를 무시했다는 생각을 한 것을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원망하는 마음이 미안한 마음으로 변한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가 불편하거나 화가 나는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나는 누군가가 연락을 해오면 즉시 연락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반드시 답변이 필요한 것이 아님에도 연락에 아무런 응대가 없으면 나를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열등의식이 있나 보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왜 연락을 했을까? 반드시 그 연락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다. 굳이 그럴만한 일도 아니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는 에고의 의도를 갖고 행동한 것이다. 그럼에도 답이 없으면 불편하다. 내가 쓴 글을 가끔 가까운 지인들에게 보내고 있다. 어떤 친구들은 글을 읽고 간단한 답변을 보내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무런 답변이 없을 경우에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이 내가 보낸 글이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일방적으로 보낸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나의 마음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상대방에게 강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연락과 글을 보내며 답이 없다고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무척 한심하다. 일방적인 연락과 글의 발송은 강요다. 이 강요에 답변을 요구하는 것은 무례이자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못된 행동이다. 내가 쓴 글은 sns에 업로드하고 있어서 읽을 사람은 알아서 읽고 있다. 친구에 대한 불편한 마음, 연락에 대한 무응대는 상대방이 무례한 것이 아니고 나의 강요이자 무례다. 그간 나로 인해 불편했던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참회한다.      


 최근에 읽은 책 ‘깨달음 그리고 지혜’는 불교의 화두 참선법은 서양 방식으로 쉽게 풀어서 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떠오르는 모든 생각과 감정은 에고의 작용이니, 그것들에 빠지지 말고 그 이면의 ‘참 자아’를 바라보라고 한다. 간화선은 화두를 바라보는 참선법이다. 올라오는 모든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그 순간에 화두를 드는 참선법이다. 저자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집중하라고 한다. 불교의 ‘이 뭣고?’ 화두와 일치한다. 감정이나 생각에 끌려 다니는 행동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주시자가 되라고 한다. 행동하는 주체는 바로 에고고, 주시자는 ‘참 자아’다. 우리의 사고, 감정, 느낌, 감각은 모두 에고의 작용이다. ‘참 자아’는 그 에고의 이면에 있는 본바탕이다. 영화가 스크린에 비치는 모습이 에고의 작용이고, 스크린의 흰 여백이 바로 ‘참 자아’다. 따라서 스크린 자체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늘거나 줄지도 않고, 깨끗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는다. 


 불교 용어 중 기억과 감정, 느낌, 감각, 경험의 저장소인 아뢰야식이 있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저장소의 내용물들이 하나하나씩 떠오른다. 그때 흘려보내면 된다. 그러면 저장소의 공간이 그만큼 비워진다. 비워진 만큼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렛고(let go)는 바로 이것이다. 저장소에는 심층의식이 존재하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이 의식이 표층의식으로 떠오른다. 수면이 고요해지면 모든 쓰레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때 표층의식을 걷어내는 작업이 바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떠오른 생각을 따라 거거나 붙잡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바로 다음 심층의식이 떠오른다. 다시 흘려보내면(let go) 된다. 이 작업의 반복이 바로 명상이고 수행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고요해져야 떠오르는 마음의 쓰레기를 알아차릴 수 있다. 알아차리면 흘려보낼 수 있다. 일상 속에서 마음 챙김을 해야 하는 이유다.     

 

에고는 이원성이고 ‘참 자아’는 일원성이다. 이원성은 너와 나를 차별한다. 차별하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언행을 한다. 우리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바로 이 이기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가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즉 이기심은 또는 이기심으로 인한 번뇌는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이 순간을 바로 알아차리기 위해 마음 챙김을 해야 한다. 승찬 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다.     


  至道無難(지도무난)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렵지 않으니

  唯嫌揀擇(유혐간택) 오직 간택(차별)하는 마음을 내지 마라.

  但莫憎愛(단막증애) 미워하고 사랑하는 차별심을 내지 않으면    

  洞然明白(통연명백) 모든 것이 막힘없이 뚫려 훤하게 된다.     


또한 몸이 아프면 힘들고, 몸이 즐거우면 즐겁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참 나’가 아니다. 몸과 마음의 장난은 스크린에 비친 영화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몸과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몸과 마음은 ‘참 자아’의 종에 불과한데, 우리는 주인인 ‘참 자아’가 종의 지시를 따르며 살아가고 있다. 주인이 종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몸과 마음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참 자아’로 되돌아가는 길이 바로 주시자로 살아가는 방법이고 이 방법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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