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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Jul 22. 2024

호흡은 마음챙김의 관문이다

길을 걷거나, 누군가와 말을 하거나, 음식을 먹거나, TV를 보거나, 그 외의 어떤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다. 길을 걸으며 어제 일을 생각하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 얘기하며 다른 친구를 떠올리기도 한다. 한 가지 일을 하다가 다른 일을 하게 될 때 그 하던 일조차 마음을 온전히 쏟지 못하고 있고, 다른 일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자동적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나의 주인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하고 있다. 일상의 반복이 주는 편안함도 있지만, 반복으로 인한 자동적 반응이 나의 주인의식과 현재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들고 온다. 신문을 보기 전에 주방에서 물을 한잔 떠 와서 혈압약을 먹는다. 그리고 거실에 앉아서 신문을 본다. 신문을 보다가 아내가 식사하라고 부르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일어나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한 채 이미 음식은 입에 들어가 저작활동을 시작한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거실로 와서 신문을 마저 읽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이런 모든 행동이 굳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게는 오히려 비효율적으로 느껴진다. 게다가 이런 모습이 마치 프로그램된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나 자신이 기계라면 이 기계를 작동하는 또는 기계에 명령을 내리는 어떤 것이나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근데 아침에 일어나 하는 모든 일련의 행동에는 주체가 없다. 영혼과 주인의식도 없이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주관하는 주체도 없이 뭔가를 자동반사적으로 하고 있는 나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과연 존재할까?      


‘왜 걷는가’라는 주제로 길을 꾸준히 걷고 있는 사람을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한 여성은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자동적으로 부엌으로 가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사람이 하는 행동이 아니고, 마치 로봇이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움직이고 있는 느낌이 들어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자녀가 대학 입시를 마친 후 바로 산티아고로 떠나 자신을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터뷰할 당시에는 산티아고 다녀온 후 공부 모임도 만들고, 걷기 모임도 만들어 자신만의 삶을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찾고 그 여정을 꾸준히 잘 이어가길 응원한다.      


요즘 꾸준히 연습하고 있는 것이 있다. 한 행동에서 다른 행동으로 움직일 때 호흡을 한 두 번 하며 무엇을 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를 인식하며 행동화하는 작업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차를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이동할 때, 마음속에 떠오른 차 마시고 싶은 마음을 알아차리고, 호흡을 한 두 번 한 후에 의자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 전에 호흡을 한 두 번 한 후에 커피를 마신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그 행동을 하겠다는 마음을 알아차린 후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아직 잘 되지는 않는다. 늘 행동이 진행된 한참 후에 뒤늦게 알아차린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약 40년 전에 송광사에서 진행하는 4박 5일간의 단기 출가수행프로그램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승보사찰인 송광사에서 한국불교의 전통 수행법인 화두 참선을 가르치지 않고 위빠사나를 가르친 것도 매우 신기했다. 처음 해 본 수행에 얼떨떨했고 왜 이것을 수행이라고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4박 5일간 좌선과 행선을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좌선 시에는 들숨에 배가 올라오고, 날숨에 배가 들어가는 것만 관찰한다. 행선 시에는 한 걸음 옮기는데 발을 올리고, 이동하고, 내리는 세 단계로 나눠 매우 천천히 이동하며 발의 감각에 집중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세 단계를 실행하기 전에 행동할 것이라는 것과 하고 있는 행동을 인식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발을 들어 올린다, 앞으로 옮긴다, 발을 내려놓는다’를 마음속으로 얘기하며 행선을 한다. 자신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늘 상기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뒤돌아 올 때는 잠시 멈춰 서서 한 두 호흡을 한 후에 뒤돌아 가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알아차린 후 뒤돌아서서 같은 방식으로 행선을 한다. 그 당시에는 이런 수행법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인내심만 키우는 연습을 하고 온 것 같았다. 근데 40년이 지난 지금 이런 방식의 수행법에 대한 이해를 겨우 하게 되었다. 참 무디고 어리석고 답답한 사람이다.    
  

이 연습을 하게 된 계기는 알아차리기 이전에 이미 자동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후부터다. 주인인 나 스스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알지도 모른 채 무엇에 홀린 듯 행동하고 있다. 게다가 어떤 행동을 하든 온전히 집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성의하고 무의미하게 자동 반복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모습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행동(A)에서 다른 행동(B)을 할 때 미리 알아차리고 하게 되면 그 하는 행동(B)에 아주 짧은 시간만이라도 집중해서 할 수 있게 되고, 이 짧은 시간에 자신과 자신의 행동이 하나가 된다. ‘지금-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과 자신이 하나가 되게 만드는 과정과 그 상황을 마음챙김이라고 생각한다. 밥을 먹으며 회사 생각을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며 영화 끝난 후 식사할 생각을 한다. 몸은 여기에 있으면서 마음은 과거와 미래 여행을 하고 있다. 삶의 불만족은 바로 여기부터 시작된다. 불만족을 제거하는 방법이 바로 ‘지금-여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호흡을 통해 우리는 ‘지금-여기’로 돌아올 수 있다. 호흡은 떠돌아다니는 마음과 생각을 ‘지금-여기’로 되돌려놓는다. 몸의 감각도 오직 ‘지금-여기’에서만 느낄 수 있고, 호흡 역시 오직 ‘지금-여기’의 호흡만 있다. 과거의 호흡은 사라졌고, 미래의 호흡은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여기’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호흡과 몸의 감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음식 주문 후 식사가 나오면 바로 먹는 것이 아니고 한 두 호흡을 한 후, 음식을 맛본다는 마음을 확립하고 식사를 하게 되면 음식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켠 후에 잠시 한 두 호흡을 하며 글을 쓰면 글 쓰는 행동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연습을 통해 ‘지금-여기’에 머무는 시간이 확장될 수 있다. ‘지금-여기’를 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다. 우리의 고통은 대부분 과거나 미래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금-여기’를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마음챙김이고, 호흡은 그 마음챙김의 관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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