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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Jul 21. 2024

유식(唯識)과 명상

유식학은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작용에 의해서 비롯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밝히는 학문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 일체유심조의 과정을 밝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것을 인식하고 마음을 검토하고 다듬고 관리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식에는 8식(識)이 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나 여섯 개의 식을 만들어낸다. 눈(眼)이 사물(色)을 보면 안식(眼識)이 형성되고 귀(耳)가 소리(聲)를 들으면 이식(耳識)이 형성되듯이 감각기관이 외부 자극을 만나 여섯 개의 의식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를 육식(六識)이라고 한다. 이 외에 자기중심적인 에고(ego)와 비슷한 제7 식인 말라식이 있고, 무의식과 비슷한 제8 식인 아뢰야식이 있다. 비슷하다는 의미는 나 자신이 전문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불교학자나 심리학자가 아니기에 개인적인 판단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의미다.    

  

아뢰야식은 살아오면서 경험한 모든 것의 저장고로 모든 기억, 생각, 느낌, 감정, 의식 등을 모아두는 곳이다. 외부 자극을 받게 되면 아뢰야식에 쌓여있는 기본 자료를 바탕으로 말라식이 활동을 하게 된다. 말라식은 ‘지금-여기’의 모든 외부 환경과 자극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그에 따른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게 만든다. 제7 식인 말라식은 자기중심적 사고로 6식을 오염시키는 의식이라 하여 염오의(染汚意)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말라식은 생명을 지닌 우리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중심적인 의식을 지녀야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켜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 의식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맞이하는 반복되는 상황도 또 매일 만나는 사람도 변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기억으로 오늘의 상황을 판단하고, 사람을 대한다. ‘지금-여기’를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어제 만난 사람을 오늘 만나도 그는 이미 같은 사람이 아니다. 하루 더 늙은 사람이고, 피부도 변했고, 모든 감각기관은 하루만큼 변했고, 어제는 기분이 안 좋았는데 오늘은 기분이 좋기도 하다. 나 역시 그렇다. 따라서 둘의 만남은 실은 네 개의 만남이 된다. 지금의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나와 너. 이 네 개의 만남이 서로 뒤엉켜 오해와 불신과 불화를 만들어낸다. 물론 때로는 사랑과 이해와 신뢰를 만들기도 한다. 사람과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과거의 상황을 바탕으로 오늘의 상황을 판단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취한다. 오늘의 이런 경험은 다시 아뢰야식에 쌓여 다음 만남과 상황 역시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여기를 살고 있지만, 우리는 어쩌면 과거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오지도 않는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설치기도 하거나 늘 불안에 휩싸이며 조마조마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이런 기억 역시 아뢰야식에 그대로 저장이 되어 우리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만약 우리가 지금-여기를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즉, 과거나 미래의 악령에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오염되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순간을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우리의 고통의 시작을 유식학 관점에서 보면 아뢰야식의 존재와 이를 끌어다 쓰는 말라식의 존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뢰야식의 기억 주머니를 가볍게 만들거나 비우는 작업이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기억의 창고인 아뢰야식이 모두 비워지면 말라식은 저절로 굶어 죽을 수밖에 없게 된다. 말라식의 음식은 아뢰야식 속의 수많은 기억이다. 이 기억을 하나하나씩 제거하고, 더 이상 기억을 쌓아두지 않는다면 말라식은 저절로 활동력을 잃게 된다. 말라식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지금-여기를 오롯이 살 수 있게 된다. 지금 주어진 모든 순간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즉 과거와 미래에서 해방이 된다면, 우리의 고통은 멈추게 된다.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      


해탈을 뜻하는 니르바나의 어원은 ‘불어서 끄는 것’ 또는 ‘불어서 꺼진 상태’라고 한다. 즉 번뇌와 욕망의 불을 끈 상태로 영원한 평안과 완전한 평화를 이룬 상태를 의미한다. 니르바나를 이루기 위해서 아뢰야식을 비우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작업은 동시에 말라식의 활동을 줄이거나 멈추게 하는 작업이다. 흔히들 명상을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바로 아뢰야식을 비우는 작업이다. 명상을 하기 위해 조용히 앉아 있으면 또는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면 아뢰야식에 갇혀있던 기억이 하나하나씩 떠오른다. 즉 유식학에서 얘기하는 심층의식이 표층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 표층의식을 붙잡지 않고 흘려보내는 작업이 바로 명상이다. 하지만 심지어 명상하는 중에도 대부분 떠오른 생각을 붙잡거나 따라가며 유관하거나 또는 무관한 생각과 망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아뢰야식의 창고를 비우는 작업이 오히려 채우는 작업으로 변하게 된다.      


“정신 집중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일상적인 의식상태에서 우리의 감각기관들을 사로잡고 있는 온갖 대상들이 차단되고, 이로부터 일상적인 의식상태에 의해 억눌려있던 상념들이 떠오르게 된다. 정신집중이 시작되면, 표층의식이 사라지면서 심층의식이 표층의식으로서 떠오르고, 이 표층의식이 사라지면서 다른 심층의식이 표층의식으로 떠오르는 과정이 반복된다. 잡념이란 반복해서 표층의식으로 바뀌는 심층의식을 가리킨다.”    (유식에서 상식으로, 정승석)      

 

명상을 하면서 떠오르는 잡념은 실은 아뢰야식이 표면으로 올라온 것이다. 이 잡념을 붙잡고 싸우거나 좋아하면 다시 아뢰야식을 쌓은 행위가 되고, 명상의 대상에 집중하며 그냥 흘려보내면 아뢰야식을 비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떠오른 잡념은 깨끗한 마음의 거울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거울은 대상을 비출 뿐이다. 거울은 대상을 붙잡거나 밀어내지 못한다. 비추어진 대상을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다른 대상이 또 떠오른다. 역시 붙잡거나 밀어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면 저절로 사라진다. 거울에 비친 대상을 보고 싸우거나 좋아하는 행위는 미친 짓에 불과하다. 이때 마음챙김이 필요하다. 명상을 한다고 하면서 허상과 싸우거나 사랑에 빠지는 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명상의 대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마음챙김이다.   

    

명상을 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또 최근에는 명상과 유사한 명상법이 유행하기도 하고 스트레스 완화나 심리적인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편도 많이 개발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평안으로 바꿀 수 있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좋은 방법이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명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면 어떤 명상법이 자신의 아뢰야식을 비워낼 수 있고, 따라서 행복의 길로 이끌 수 있는지 판단하고 선택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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