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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고 Aug 15. 2024

퍼펙트 데이즈

삶의 의미와 목적은 같은 것일까? 아니면 다를까? 의미는 좀 더 근원적인 질문인 것 같고, 목적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질문인 것 같다. 최근 몇 달간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며 벗어나기 위해 빅터 프랭클의 책을 읽고 있다. 그의 책에서 힘들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의미보다는 목적에 무게를 두고 살아왔고,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제법 오랜 시간 노력했지만 달성하지 못하고 심지어 목적조차 희미해지면서 지쳤던 것 같다. 빅터 프랭클이 얘기한 실존적 좌절 때문에 만들어진 실존적 공허감이다. 의미를 추구하고 의미를 찾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면 이런 좌절이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미는 과정이고 목적은 결과물이다.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할 때 부산물로 결과물이나 성취물이 따라온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찾는 방법으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내는 일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어떤 일을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태도로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라고 했다. 즉 삶의 의미를 찾는 일, 삶의 방향을 찾는 사람은 자신 앞에 전개되는 다양한 상황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삶은 한 면에는 희망적이고 아름답고 즐거운 일이 존재하고, 다른 면에는 절망적이고 괴롭고 추한 것이 존재한다. 양면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삶의 의미를 찾고 그 방향으로 가는데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이고 즐겁고 행복한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삶의 양면 중 행복한 면만 받아들이길 원한다면 그런 삶은 평생 누릴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 파랑새를 쫓는 꼴이 된다.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고난을 겪어봐야 행복의 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행복의 다른 단어는 고난과 불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고난 속에서도 행복한 순간은 존재하며, 행복 속에서도 불행한 순간은 존재한다. 손은 손등과 손바닥으로 이루어져 있다. 빅터 프랭클의 글을 읽으며 돌이켜보니 힘들었던 이유는 아직도 사회적인 성공과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였다. 매우 운 좋게도 이번 상황이 목적에서 의미로 들어가는 마지막 신고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앞으로도 굴곡은 늘 존재하겠지만 이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조금이나마 얻게 된 것 같다.      


업무 때문에 지난주부터 딸네 가지 않고 혼자 집에서 지내고 있다. 업무가 없는 날은 딱히 할 일도 없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도 없다. 그럼에도 아침 7시경 눈을 뜬 후에 명상을 한 시간 정도 한다. 때로는 늦잠을 자서 명상을 하지 않는 날도 있다. 8시경 아침 식사를 하고 신문을 본 후에 9시경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쓴 글을 sns에 업로드하고 나면 12시쯤 된다. 점심 식사 후 30분 정도 낮잠을 자고 나서 오후 두 시경 도서관에 가거나 지인을 만나기도 한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에는 도서관처럼 지내기 편안한 곳이 없다. 시원하고 조용해서 휴식을 취하거나 책 읽기에는 이만큼 좋은 환경이 없다. 오후 네다섯 시경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한두 시간 정도 걷고 온다. 저녁 식사 후 TV를 보며 밤 11시경 잠을 잔다. 무척 평범한 일상이다.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산다고 해서 어떤 것을 기대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 역시 없다.    

  

나의 일상을 열거하고 나니 얼만 전에 보았던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떠오른다. 이 영화 주인공의 삶이 나와 다르지 않다. 그의 일상과 나의 일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 보여도 실은 같다. 딱히 추구하는 바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다. 그냥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며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심각한 고민거리도, 이루어야 할 특별한 목표도, 특별한 욕심이나 꿈도 없다. 그와 나의 차이점 한 가지가 있다. 그는 화장실 청소에 진심을 다한다. 나는 면접관으로 또는 상담사로 그만큼 최선을 다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다. 나도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는 공용화장실 청소를 하며 생업을 이어가고, 일 마친 후 술 한 잔 한 후에 집에 돌아와 책을 읽고 잠을 잔다. 나는 일어나 글을 쓰거나 당일 주어진 업무를 하고, 걸은 후 길벗들과 술 한 잔 하고, 책을 읽고 잠을 잔다. 다른 사람들 삶은 우리와 많이 다를까? 우리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꿈과 야망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며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희망과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삶을 살든 우리의 삶은 이미 완벽하다. 따라서 우리의 하루하루도 완벽하다. 다만 그 완벽한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다. 빅터 프랭클에 의하면 우리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한다. 세상은 모자이크 판이고, 모자이크의 한 조각이 우리네 삶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자유의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자이크의 한 조각이라는 유일무이한 삶의 의미를 찾고, 그 조각이 역할을 제대로 하게끔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우리의 운명이 비록 결정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는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갖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우는 표정과 웃는 표정을 매우 미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두 가지 표정은 하나가 된다. 우는 표정이 바로 웃는 표정이 되고, 웃는 표정이 우는 표정이 된다. 울고 웃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바로 주인공 한 사람이다. 울고 웃는 삶이 우리네 삶이고, 그런 면에서 우리의 하루하루는 완벽한 하루일 수밖에 없다. 사과의 모양은 모두 다르다. 모양이 다르다고 사과가 아닌 것이 아니다. 삶 역시 이와 같다. 행복한 삶만이 삶이 아니고 고통스러운 삶 역시 삶이다. 즐거운 날만 날이 아니고 괴로운 날도 날이다. 그러니 매일매일 완벽한 날이 된다.      


유일무이한 모자이크의 한 조각인 나의 삶, 단 한번뿐인 일회성의 조건을 지닌 삶이 나의 운명이다. 나의 운명은 유일무이하고 일회성이라는 피할 수 없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운명이다. 벗어날 수 있다면 운명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택권과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 인간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나에게 주어진 모자이크 조각의 의미는 무엇일까?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니체가 의미를 찾는 방법을 매우 명쾌하게 얘기했다. “그대의 의무를 다 하도록 하라. 그러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대의 의무란 무엇인가? 바로 그날의 요구를 행하는 것이다.” 그날의 요구는 매 순간 주어진 일이다. 그 일이 좋건 싫건, 마음에 들건 아니건, 좋아하는 일이건 아니건, 주어진 일에 진심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리석은 자가 답을 찾기 어려울 때 현자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억지스러운 자신의 고집과 독선을 따르는 것보다는 현명한 태도다.      


내게 주어진 하나의 좋은 자질이 있다. 건강한 다리와 발을 갖고 태어났다. 그리고 걷기를 좋아한다. 언젠가부터 걷기를 통해 나의 할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과 기대를 하고 있었다. 가까운 친구 한 사람은 내가 걷기를 통해 주변 사람과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 아닌 예언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걷고의 걷기 학교’를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다. 걷기 동호회는 많이 있다. 하지만 걷기 학교라고 명명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어서였다. 걷기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그 배운 것이 삶 속에 녹아 도움이 되길 바라는 생각에서 지은 이름이다. 비록 선생님은 없지만, 길과 자연이 선생님이 되고, 걷기 자체가 선생님이 되고, 길벗이 선생님이 된다. 참다운 배움은 누가 가르쳐줘서 얻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배워가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노력할 때 삼라만상이 스승이 된다. 유일무이한 존재인 나의 독창성과 차별화를 표현하고 펼칠 수 있는 곳이 바로 ‘걷고의 걷기 학교’다. 글을 쓰다 보니 결국 이 길을 오기 위해 힘든 시간을 견뎠다는 생각이 든다. 힘든 시간 역시 이 길을 찾는 여정 중 일부가 아니었을까? 우리네 하루는 완벽한 하루고, 우리네 삶은 완벽한 삶이다. 뭔가를 찾아 나설 필요조차 없다. 주어진 일을 매 순간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하는 것이 우리의 하루와 삶을 완벽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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