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서 만난 후배가 있다. 헤드헌터 업무를 하며 만난 후배니 거의 인생 후반에 만난 친구다. 십수 년 후배니 학창 시절에 만날 일도 없었고, 사회에서 만났으니 후배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말 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업무를 하며 자주 만나다 보니 이제는 친하고 편안한 친구가 되었다. 내게 용돈벌이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술친구가 되어 가끔 술도 한잔 하고, 가끔은 길을 함께 걷는 길벗이 된 고마운 친구다. 기계를 잘 다루고 손재주가 좋아 일상의 불편함을 창작력을 발휘하여 변화를 만들어 내는 친구로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 일상의 필요한 물품을 선물하기도 하는 마음 따뜻한 친구다. 이 친구에게 부러운 점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뛰어난 친화력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쉽게 융화되고, 멋진 화술로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겉과 속이 같은 친구다.
가끔 업무 상 이 친구 차를 타고 이동할 때가 있다. 얼마 전에는 사회 저명인사들이 나눈 대화를 AI로 편집해서 노래를 만들었다고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도 이 노래가 AI가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뉴스에 나온 대화로 작사를 했고, 작곡과 노래는 AI가 만들었다고 한다. 같은 노래는 재즈나 트로트, 가요 등 어떤 형식의 음악으로도 변환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얼마 전 한 유명 작곡가가 노래 심사 위원으로 참석해서 1등으로 선정한 노래가 AI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내용을 확인한 후 놀랐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이 난다. 참 놀랍고 희한한 세상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 또는 다른 행성 사람들의 얘기인 줄 알았는데, 이미 변한 세상은 내 주변에 나도 모르게 들어와 있고, 다만 나만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점점 세상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컴맹까지는 아니어도 일상에서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해 불편함을 겪기도 한다. 최근에 작은 승용차 한 대를 구입했다. 21년간 타고 다녔던 차가 노후 되어 바꿀 시기가 되었다. 자동차 영업 사원이 구매 과정을 설명해 주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량 구입 금액만 송금해 주면 차를 가져다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카드를 만들어야 했고, 차량 대금은 카드로 결제하고, 대신 일정 금액을 할인받고, 자동차 보험도 새로 가입하고, 기존 보험은 다른 것으로 바꾸는 등 뭔가 많이 복잡했다. 차량 계약과 카드 신청 후 핸드폰에는 카드사와 자동차 회사, 보험회사 등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자나 카톡을 연이어 보내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하나하나씩 직접 연락이 와서 모든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너무 전문화와 세분화되었기 때문에 한국말임에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고객을 위한 전문화와 세분화가 아닌, 자동차 회사에게는 편의를, 고객에게는 불편함을 제공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허긴 요즘 세대는 직접 통화를 하며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비대면으로 처리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하니 자동차 회사를 탓할 이유가 전혀 없다. 회사는 세대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고, 다만 나 스스로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서서히 막 뒤로 사라질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심리적 철수보다는 일상에서 느껴지는 사회적 격리와 분리다. 받아들일 수밖에.
후배가 며칠 전 내가 싫어할만한 노래를 AI 기술을 이용하여 한곡 만들어 보내주겠다고 한다. 참 표현도 짓궂다. 이왕이면 내가 좋아할 만한 노래를 만들어주지, 싫어할만한 노래를 만들어주겠다니. 그 친구의 표현 방법이다. 할 일을 다 해주고 도와주면서도 투덜대고 잔소리를 하는 흔히 얘기하는 츤데레 같은 친구다. 얼마 전 업무 차 그 친구 차를 타고 이동한 적이 있다. 업무 마치고 돌아올 때도 그 친구 차를 이용했고, 같이 맥주 한 잔 마신 적이 있다. 그날의 일상으로 작사를 한 후, AI의 도움으로 작곡과 노래를 만들어서 어제 보내주었다. 노래를 들으니 그 친구 의도와는 다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 노래를 보내 주었고, 친구들은 모두 재미있고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진다는 찬사를 보내주었다. 한 친구는 장어를 사주겠다고 한다. 한 친구가 보내 준 음악이 다른 친구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비록 서로 모르는 친구들이지만 이미 음악을 통해 친구가 되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음악을 다시 들어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과연 창작의 세상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단순한 기계를 작동하는 오퍼레이터의 세상을 살고 있는가? 이 음악을 창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전문적인 기계를 다루는 기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창작의 기준과 정의는 무엇일까? AI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도 충분히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것을 과연 창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전에 타자를 배울 때 한 친구가 타자의 자판 하나로 모나리자의 모습을 그려낸 그림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다. 과연 그 그림은 모작일까? 아니면 단순한 타자기를 이용한 장난일까? 창작과 모작, 그리고 기술이 만들어 낸 모호한 작품이 있다. 창작은 점점 더 우리 세상에서 사라지고 기술을 이용한 다양한 작품이 쏟아진다. 물론 작가들은 이 역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AI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사전에 머릿속에서 구상을 해야 하고, 그 구상을 기계를 이용해서 만들어내니까.
가짜 뉴스와 가짜 합성 사진이 판치는 세상이다. 실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든 세상이 도래했다. 하긴 신문과 미디어에 나온 뉴스 역시 가짜와 진짜, 사실과 진실, 허구와 사실을 구별하기 힘들다. 가짜를 또는 허구를 진짜라고 우겨대면 언젠가는 그것이 진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 허구를 진짜로 우기는 사람은 과연 진짜일까, 아니면 가짜일까? 이런 사람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과연 알기나 할까?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과 실제 그 사람과의 괴리감은 얼마나 클까? 어쩌면 이런 사람은 자신이 만든 가면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죽는 순간까지 가면을 벗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이미 진짜가 아닌 가짜가 추구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절대로 진짜가 될 수 없다. 허구 세상에 속아 자신도 허구가 되어 간다. 마치 홀로그램 영상과 같다. 진짜 자기는 홀로그램 영상을 만드는 사림임에도 그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홀로그램에 나타난 영상을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진실과 허구, 참 자기와 거짓 자기의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 불쌍한 사람이다.
매일 걷고 글을 쓰고 있다. 걷는 것은 내 몸을 직접 움직이는 것이다. 글 쓰는 것 역시 내가 직접 글을 쓰고 있다. 물론 가끔 책이나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는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인용 사실을 적거나 아니면 자료를 나의 것으로 소화한 후 글로 표현한다. 이 역시 사실이고 진실이다. 참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세상에 참답게 살려고 아등바등 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 모습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적어도 내가 걷는 것은 나의 의지와 다리로 걷고 있는 사실이고 참이다. 내가 글 쓰는 것 역시 나의 창작이고 사실이고 참이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 참답게 나를 지키며 살아가고 싶다. 후배가 보내 준 음악이 비록 작곡과 노래는 AI가 만들었다고 해도, 그 후배가 나를 생각하며 만들어 준 음악 내 포함된 마음은 참이고 진실이다. 그의 마음이 고맙다. 조만간 그 친구를 만나 술 한 잔 대접할 생각을 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음악의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또는 첨부로 올려도 되는지 잘 모르지만 어떤 상업적인 목적이 없으니 아무 이상이 없으리라 믿고 첨부한다. 만약 문제가 된다면 바로 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