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자신을 만나는 멋진 상황이 펼쳐집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과거에 불과합니다. 과거를 붙잡고 씨름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또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역시 의미가 없습니다. 미리 걱정한다고 걱정이 사라진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걱정은 다른 걱정을 불러올 따름입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에게 유일하고 남아있고, 소중한 것은 바로 오늘 하루입니다. 우리 자신도 어제의 자신이 오늘의 자신이 아닙니다. 몸도 하루만큼 노화되었고, 어제의 생각은 사라지고 오늘의 생각이 나타나고, 어제의 불편한 관계가 오늘은 편안한 관계로 변화됩니다. 나와 나의 세상이 어제와 다르듯이, 그와 그의 세상 역시 어제와 다릅니다. 그러니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원수가 될 일도 없고, 어제 사랑하는 사람이 오늘 반드시 사랑한다는 보장 역시 없습니다. 다만 오늘 새로운 세상에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나 오늘 만나는 새로운 사람과 상황을 반갑게 맞이하며 활기차게 살아갈 뿐입니다.
언젠가부터 생일을 잊고 살아갑니다. 나이조차 기억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 집에서도 제 생일잔치는 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다만 손자와 손녀가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고, 불을 끄는 것을 좋아하기에 아이들을 위한 조촐한 파티만 할 따름입니다. sns에서 제 생일을 기억하고 의미 없는 생일 축하 문자를 보내옵니다. 제가 근무했던 유관 기관에서 제 자료를 지우지 않아 자동 메일로 무의미한 축하 문자가 옵니다. 그런 문자를 보며 제 생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제 생일이 음력인지 양력인지 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생일을 따지거나 기억하지 않는 이유는 나이 든다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일을 챙기고 챙겨 받는 일이 번거롭고 귀찮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꾸준히 우정을 이어가며 만나는 사람들과는 만날 때 생일잔치 하듯 즐기며 만납니다.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는 나이가 되어가고 어떤 상황이 갑자기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다. 칠순에는 가까운 지인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하는 것은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자주 만날 일이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간의 인연에 감사하는 자리를 만들어 인사를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며 약속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딱히 할 일이 없는 백수 친구가 많은데도 그렇습니다. 각자 병원도 가고, 집안일도 있고, 자신이 할 일도 있고 하니 사회생활 때보다 더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만날 때 즐겁고 좋은 대화를 나누며 추억을 쌓아나가고 싶습니다.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늘에 들어가면 조금 시원해집니다. 관악산역에서 만나 사당역을 지나 양지 시민의 숲까지 13.3km의 서울 둘레길을 걸었습니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참 잘 만들어진 길입니다. 산책하기에 이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 진출입이 모두 지하철과 연결되어 근접성도 좋습니다. 물론 걷다가 안내 리본이나 표식을 놓쳐 알바를 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즐거움입니다. 점심 식사를 먹으며 핸드폰을 여니 단톡방에 있는 친구들이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메시지를 받고 나니 기분이 괜히 좋아집니다. 기분이 좋아 함께 걷는 길벗에게 제 생일을 얘기했습니다. 이율배반적인 저의 모습을 보며 괜한 일을 했다는 후회를 잠시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조용히 지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오늘 길은 거리도 제법 있고 난도도 제법 있는 길입니다. 하지만 걷기에 너무 좋은 명품길입니다. 물을 다섯 병이나 갖고 갔는데, 모두 마셨습니다. 그만큼 땀을 많이 흘린 날입니다. 오늘 목적지인 양재 시민의 숲에 도착해서 길벗이 검색한 아귀찜 식당에서 뒤풀이를 했습니다. 시원한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술을 한잔 마시는 그 즐거움은 걷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어쩌면 음식을 맛있게 먹고 마시기 위해 걷는지도 모릅니다. 입맛이 없다, 잠이 안 온다, 몸이 개운하지 않다는 것은 물론 노화의 현상일 수도 있지만 몸을 괴롭힐 정도로 움직이고 걸으면 저절로 이런 증상을 사라집니다. 제법 피곤할 정도로 많이 걸으면 입맛도 돌아오고, 불면증은 사라지고, 몸은 무척 개운해집니다. 식당 테이블에 음식과 빈 술병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한 길벗이 케이크를 들고 들어옵니다. 전혀 예상도 못한 시추에이션입니다.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고마운 마음을 안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고 축하해 준 고마운 길벗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생일 파티는 이번 한 번이 마지막이 되면 좋겠습니다. 함께 걷고, 즐겁게 먹고 마시고, 수다를 즐기는 매일이 우리의 생일입니다. 자주 만나는 길벗도 있지만, 오랜만에 나오거나 한번만 나온 후 다시 오지 않는 길벗도 있습니다. 만나는 그날이 우리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날이고 그날이 우리의 생일입니다. 그러니 번거롭게 생일잔치를 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밴드 개설일을 우리 모임의 공식적인 생일로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밴드에서 연말 파티나 크리스마스 파티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날 역시 다른 날과 같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해파랑길을 마친 후, 서울 둘레길 한 바퀴 모두 완보 후 등 걷기 완보를 기념하는 날이 우리 밴드의 공식적인 생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만나 여러분의 의견을 들은 후 결정하겠습니다. 밴드는 저 혼자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길벗과 함께 만들어가는 곳입니다. 좋은 의견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어제 만났는데 벌써 보고 싶어 집니다. 빨리 그날이 오길 기다리며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