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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Jan 14. 2017

저항하고 욕망하는 두 여자

<대니쉬 걸> 속 에이나와 게르다의 그림에 관하여

스포일러: 강함 


 덴마크의 유능한 화가 에이나(에디 레드메인)는, 똑같아보이는 풍경화로 매번 화랑을 채운다. 풍경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바일레(Vejle). 바일레는 한스와의 추억이 있는 습지대다. 방문객들은 그 바일레의 풍경화를 보며 에이나의 예술가적 천재성에 그저 감탄한다. 의문을 품는 것은 오직 그의 아내인,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 뿐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남편은 어째서 매번 똑같은 장소를 그릴까? 무엇이 같은 그림을 보는 방문객들을 매번 열광하게 만드는 걸까? 바일레의 풍경과 바일레를 담은 풍경화, 그리고 그 풍경화를 바라보는 게르다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마치 그 그림에 무언가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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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미제라블>로 뮤지컬 영화의 정수를 맛본 톰 후퍼 감독이 또 하나의 걸작을 만들어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으로 87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에디 레드메인은 이 영화로 또 다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바로 <대니쉬 걸>이다. 영화는 최초의 트렌스젠더였던 덴마크의 한 여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성소수자와 그들을 놓고 벌어지는 문제들을 수면 위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영화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최초’라는 이유로 의미를 가지는 것들에 궁금증을 갖는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트렌스젠더는 누구였을까? 이러한 궁금증의 중심에 두 명의 화가, 에이나와 게르다가 있다.

△ 게르다와 에이나(릴리)

 에이나와 게르다는 지금으로부터 약 90여년 전,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에 거주했다. 1926년의 덴마크에는 19세기 유럽 귀족의 문화와 거기서 비롯된 엄격한 규율이 의상, 건축 양식, 생활 방식 등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영화에서 보여지듯 이 시대의 신사들은 사교계의 규율에 따라 숙녀를 에스코트 했고, 행동 반경에 제약이 있던 여성들은 구설수에 오르지 않으려고 발목을 드러내는 옷조차 피했다. 하지만 작품에는 기존의 질서과 새로운 질서가 융화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세상은 변해가고 있었다. 흑인 남성도 그림을 구경하기 위해 술잔을 들고 화랑을 누볐다. 에이나와 게르다는 이와 같은 과도기적인 시대에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영화의 무대다.


 변화하는 시대에 부흥하듯 인물들 역시 전형성에서 어느 정도 탈피해있다. 에이나는 아내 대신 빨래를 정리하는가 하면, 화장을 직접 고쳐주기도 한다. 아내가 떠나간 화장대의 빈자리를 외면하지 못하는 그는 말하자면 여성적 욕망이 드리워져있는 남자다. 반면 게르다는 신사들이 그러듯 파이프에 담배를 꽂아 피우며, 남자 모델에게 과감한 명령을 하고, 맘에 드는 이성에게 먼저 다가가 고백을 한다는 점에서 남성적(shameless)이다. 그녀는 번번히 라스무센에게 퇴짜를 맞는 바람에 화가로서의 성공에 목말라있다. 이외에도 한 번에 두 명의 남자를 상대하는 문란함과, 그러한 일화를 남들 앞에서 서슴지 않고 이야기하는, 개방적이고 당돌한 올라라는 여성 인물까지 등장한다. 이렇듯 영화 속 인물들은 권위적 남성상과 조신한 여성상에서 어긋나있다. 그들은 시대에 순응하기보다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부류였다.


 인물들은 전형성에서 일정 부분 벗어난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조차 시대를 완벽하게 피해갈 순 없었다. 에이나는 남자가 여성복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 너무나도 길들여져있어, 올라 대신 모델이 되었을 때 그녀의 옷을 입기를 강렬히 거부한다. 게르다는 에이나의 에스코트 없이는 ‘추문(scandal)을 좋아하는 여자’라는 얼토당토않는 타이틀을 부여받으며 불가피하게 의존적이 된다. 시대를 초월한 캐릭터는 시대 속에서 충돌을 겪으며 저항한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 의식은 어떠한 방식을 거쳐 가까스로 해소되는데,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예술행위, 드로잉과 댄싱이다.

△ 에이나의 바일레(vejle) 풍경화
△ 그림을 그리는 붓으로 화장을 하는 에이나의 모습

 그 중에서 이 영화가 가장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일레의 풍경화다. 에이나에게 바일레는 여성적 욕망을 처음으로 실현한 공간이었다. 에이나의 소꿉친구였던 한스는 에이프론을 입은 에이나가 너무 예뻐보여 키스를 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금방 잊혀진 사건이었으나, 에이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에이나는 그 후 바일레를 줄곧 동경했고, 그럴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에이나를 유능한 화가로 만든 그 그림들은 여성성에 대한 에이나의 갈망이 표현되어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여장을 통해 릴리가 된 이후, 에이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 동경하고 갈망하던 것을 예술로서가 아닌 현실로서 실현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물감과 붓은 캔버스 대신 얼굴을 채색하는데 쓰였다.


 트렌스 섹슈얼이었던 릴리는 여장한 남자를 좋아하는 호모 섹슈얼의 핸드릭을 지속적으로 만났다. 이에 게르다는 에이나를 동성애자로 의심했지만, 에이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냥 릴리인 순간이 있어, 그리고 그(핸드릭)가 그걸 봤던 것 같아. 넌 (내 안의 릴리가) 보이니?” 이에 대한 게르다의 대답은, “릴리는 존재하지 않아.”였다. 에이나는 바일레에서 한스가 키스했던 게 바로 ‘그녀(her)’라고 할 정도로 릴리라는 존재를 신뢰했지만, 게르다는 릴리의 존재를 완벽하게 부정했다. 이런 게르다와 달리 핸드릭은 릴리를 존중해주었기 때문에, 좌절을 겪을 때마다 에이나는 핸드릭을 찾아가 위로를 받았다.


 에이나는 릴리가 되면서 억눌려있던 여성성을 표출할 수 있었지만, 남성으로서의 한계가 늘 그의 뒤를 따랐다. ‘릴리’의 꿈에서 깨고나면 ‘에이나’의 현실이 있었다. 핸드릭의 집(꿈)을 빠져나오자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해괴한 모습이 유리창(현실)에 비춰졌다. 완벽한 여자의 모습으로 둔갑하기위해 프랑스 매춘부를 찾아갔지만, 거기서도 그는 결국 좌절했다. 언제까지나 그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었다. 무도회장으로 향하면서 게르다에게 “난 언제까지나 너만큼 예쁘지는 못할 거야”라고 말하던 순간의 은연중의 깨달음이 계속해서 그를 가두었다. 남성 육체에 가지고 있는 에이나의 혐오감은 날로 커졌고 원인 불명의 복부 통증으로까지 이어졌다. 화학적 불균형이라는 오진과 방사선 치료라는 잘못된 처방, 도덕적 부패라는 단정은 나날이 그를 병들게 만들었다. 욕망의 실현을 눈 앞에 둔 상태에서 에이나는 날로 피폐해져갔고, 어느새 바일레의 풍경은 그에게서 완벽하게 잊혀졌다.

△ 릴리의 모습을 그리는 게르다

 결국 에이나는 사회를 외면한 채 은둔 생활을 이어간다. 에이나가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자 그들 부부는 생활비조차 없는 빈털털이 신세가 되고, 게르다는 생활비와 진료비를 벌기 위해 릴리를 모델삼아 다시 그림을 그린다. 라스무센에게 극찬을 받았던 릴리 초상화는 이번에도 많은 인파를 화랑으로 끌어들이고, 이로써 게르다는 그토록 원하던 성공의 욕망을 실현한다. 게르다는 이전과 같은 평범한 부부의 삶을 그리워하지만, 에이나는 수술대에 오르기 위해 플랫폼을 떠난다.


 에이나의 선택은 이기적이고 극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여자들처럼 모성애를 가지고 있었다. 에이나는 릴리의 모습으로 뛰어가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클리닉의 임신을 한 여성들을 부러워하며 행복하게 대화하기도 한다. 한스에게 ‘결혼은 둘이서 새로운 한 생명체를 만드는 일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가, 자신이 생물학적 남성이라는 사실이 신의 실수이자 병(ill) 쯤으로 생각하는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환 수술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에이나의 모성애는 그의 믿음대로 그가 이미 여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릴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두 번째 수술 전날밤 릴리는 게르다를 보내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눈물은 어떤 예감의 눈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임신을 하는 완벽한 여자가 되는 것은 의학의 힘으로는 불가능했고, 그런 여자도 남자도 아닌 릴리를 받아줄 시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릴리라는 자아를 인정받기 위해 저항했지만, 시대에게 그것은 그저 ‘최초’라는 이름으로 기록되는 ‘해프닝’일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감독은 가장 아름다운 형상의 꿈을 선사한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릴리’라고 부르는 엄마의 모습을.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자인 '완벽한 릴리'의 모습을. 시대는 너무도 틀에 박혀 있었고 프레임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냉혹했지만, 각광받는 화가가 아닌 한 명의 여자가 되고 싶었던 에이나, 혹은 릴리는 마침내 그 욕망을 실현하는데 성공했다. 엄마의 품 속에서, 그리고 게르다의 그림 속에서.

△ 릴리와 릴리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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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 feel myself getting better when I listen to your pencil.
You’ve always sketched me better than I was.
But what you draw, I become. You made me beau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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