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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Apr 30. 2017

전도연의 여자들 (1)

그녀는 사랑받기 위하여 행동한다

스포일러: 보통



 배우의 연기란 관객의 처지나 위치 혹은 공감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받기 마련이다. 한 명의 관객이 연기력에 관하여 객관적인 점수를 매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이러한 수고로움을 대신해주는 여러 영화제들이 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의 영화제는 이미 세계 3대 영화제라고 불릴 정도로 그 명성이 드높다. 국내 배우들도 이들 영화제에서 인정을 받아 1987년 베니스 영화제에서는 <씨받이>의 강수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2007년 칸 영화제에서는 <밀양>의 전도연이, 2017년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김민희가 각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수상 연도에 모두 숫자 ‘7’이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여주인공들은 작중에서 모두 비극을 맞거나 비극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이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비극적인 운명을 감수하는 세 여자의 조소다.


 강수연의 활동 시기는 8-90년대에 머물러있고, 김민희는 모델 출신 배우라는 낙인을 떨쳐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캔들에 휘말리는 바람에 대중들에게서 본인의 역량에 걸맞은 인정을 지 못하고 있다. 반면 전도연은 1997년 데뷔작 <접속>에서부터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2016년 TV 드라마 <굿와이프>로 11년 만에 브라운관 복귀에 성공하는 등 현재까지도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십여 년이 흘렀지만 전도연은 아직 한창인 배우다. 그녀는 국내 유일무이한 칸의 여왕이자 스크린의 여왕이다.


여자는 이해받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다. -은희의 라디오 대본 중에서.


 <접속>의 라디오 DJ가 녹음 도중 내뱉은 이 서양 속담은 전도연이라는 배우를 표현하기 위함인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언제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 여자를 연기하기 때문이다. 전도연의 여자들은 꿈이나 직업적 목표 혹은 사회적 지위를 성취하기 위해 투쟁하지 않으며, 신념을 지키거나 부정한 사회로부터 저항하기 위해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녀들이 능동적인 순간은 사랑하는 순간이며,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부를 기꺼이 내던질 줄 안다. 전도연은 사랑 앞에서 가장 빛나는 여성의 단면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표현해낼 줄 아는 배우다. 그녀의 연기는 사랑에 목이 마른 인물들의 생기이자 활력이다.

<내 마음의 풍금> 속 삼각관계; 수하(이병헌), 은희(이미연), 그리고 홍연(전도연)

 전도연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미묘한 삼각관계에 빠지며, 영화 내적으로 그녀가 차지하는 자리는 두 남녀 사이의 어딘가다. <접속>에서 수현은 연인 관계인 기철과 희진 사이에 있으며, <내 마음의 풍금>에서 홍연은 같은 날 전임을 온 수하와 은희 사이에 있다. 수현은 기철의 발 크기까지 알 정도로 기철에게 관심이 많지만, 그가 동거 중인 친구 희진의 애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홍연은 마을에서 수하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지만, 수줍음이 많은 성격 때문에 은희에게 마음을 주는 수하를 그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한다. 게다가 스승과 제자라는 신분 차이는 수하와 은희 사이에서 홍연을 늘상 소외시킨다.


 이러한 구도는 영화 <하녀>(2010)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별 볼일 없는 남자들 사이에서 권태를 느끼던 은이 저택의 객식구가 됨으로써 훈(이정재)을 만난다. 외부에서 내부로의 진입은 은이의 권태를 깨뜨리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훈에게는 아내 해라가 있고 은이는 그들 부부의 허드렛일을 도맡는 하녀에 불과하다. 사랑에 눈이 먼 은이는 지위와 제도에 연연하지 않는 관계를 꿈꾸다 몰락의 길을 걷는다.

동현을 향한 수현의 마지막 접속, 동현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뇌한다.

 <접속>의 수현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동현(한석규)을 만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동현과 영혜 두 남녀 사이에 놓이게 된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과는 달리 전도연의 여자들은 사랑 앞에 소외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접속>의 기철과 <내 마음의 풍금>의 수하는 그녀들을 늘 기대하게 만들지만, 수현에게 선물한 열쇠고리가 결국 희진의 몫이 되듯 수현을 향한 기철의 마음은 일시적일 뿐이며, 홍연을 향한 수하의 마음 역시 ‘같잖게시리 병 주고 약 주고 북 치고 장구치고 혼자서 다 하는구먼’이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 연정(戀情)이 아니다.


 이렇듯 작중에서 전도연의 인생은 ‘지나가는 여인2’라는 ID가 그렇듯 주연이 아니며, <하녀>를 포함한 세 영화에서 그녀가 하는 사랑은 짝사랑을 넘어선 무모한 사랑이다. 그녀는 친구의 애인이나 선생님 혹은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며 그 속에서 종종 사랑의 진실됨을 느끼지만, 상대는 그저 다른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거나 다른 여자의 빈자리를 채우려 들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 사랑이란 애당초 결실을 맺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수현과 홍연, 그리고 은이는 사랑 앞에 번번이 좌절하면서도 끊임없이 사랑을 염원한다. 마치 사랑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접속>과 <내 마음의 풍금> 깊이 보기.


 수현은 두 남녀 사이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외로움을 전화 상담과 인터넷 채팅으로 달랜다. 텔레마케터 근무 중의 수현은 동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객이 이성에게 선물할 물건을 직접 골라주거나 고객의 이름으로 상대에게 물건을 대신 보내주는 등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푼다. 인터넷 채팅 중의 수현은 옛사랑을 추억하는 동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책하면서도 동현의 사랑에 관여하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큐피드를 자처함으로써 사랑을 간접 체험하고 대리 만족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특별한 치료약이 없는 안구 건조증처럼 그녀가 달고 살던 사랑의 결핍은 시종일관 그녀를 자조적으로 만든다.

 접속이라는 행위는 수현과 동현을 대립하게 만드는 한편 이들을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수현과 동현은 통신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며, 이것은 서로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계기가 된다. 사랑을 타인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던 수현은 동현의 조언을 듣고 자신의 사랑을 향해 달려 나가며, 과거를 잊지 못하고 새로운 관계 맺음을 거부하던 동현은 수현 덕분에 걸어 잠겄던 마음의 문을 연다. 마지막까지 외면하고 숨기만 하던 동현은 수현의 마지막 접속을 수신하고서 그녀에게로 달려 나간다. 수현과 동현만의 사랑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싹을 틔워낸다. 


 <내 마음의 풍금>은 '풍금'이라는 단어가 주는 바로 그 느낌 그대로의 영화다. 교실 중앙 화목 보일러 위에 쌓여있는 벤또(도시락)와 새 학기 첫날 선생님을 골탕 먹이는 학생들. 산수 시간 주판알을 튕기는 아이들과 신체검사날 몸에 소독약을 뿌려 이를 잡는 어른들. 우물물을 길어다 손빨래를 하는 마당 풍경과 숯을 올린 인두로 옷을 다리는 방 안 풍경은 6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한다. 

운동회에서 수하와 달리기를 하고 있는 홍연

 알고 보면 <내 마음의 풍금>은 학창 시절의 기억에 대한 홍연의 회상이다. 그 시절 홍연과 수하 그리고 은희가 연주하던 풍금의 선율은 저마다 달랐다. 홍연은 수하를 생각하며 풍금을 연주했고, 수하는 홍연의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관했다. 마찬가지로 수하는 은희를 생각하며 풍금을 연주했고, 은희는 수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를 방관하는 꼴이 됐다. 홍연의 외로운 짝사랑 혹은 아련한 첫사랑은 수하가 갑작스레 서울로 떠나가면서 좌절되었다. 결국 그 시절 속 세 인물 중 사랑을 성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좌절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정겨운 지난날의 추억이 그렇듯 시종일관 아름답다. 그리고 이 영화적 아름다움은 엔딩씬 덕분에 실제로 홍연의 추억이 된다. 저마다 다르던 풍금 소리는 추억이라는 이름 아래 각색되어 하나의 선율로 합쳐진다. 그렇게 이 영화는 '내 마음(홍연의 마음)의 풍금'이 된다.



 <접속>의 수현은 사랑 그 자체의 감정에 너무나도 충실한 인물이며, <내 마음의 풍금>의 홍연은 시골다운 순박함과 수줍음,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솔직함을 가진 인물이다. 평범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결핍되어있는 모습을 가진 이 매력적인 인물들은 자신들이 바라던 대로 사랑받는 여자가 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하녀>의 은이만은 그러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정반대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영화 <하녀>(2010)의 전도연

 전도연은 유부녀의 밀회를 다룬 <해피엔드>(1999), 다방 레지와 시골총각의 로맨스를 다룬 <너는 내 운명>(2005)을 거쳐 농밀하고 능란한 연기를 선보이기 시작한다. 이후 그녀는 순애보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독립적이면서도 위태로우며 자기 파괴적인 인물의 묘사를 시도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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