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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May 13. 2017

전도연의 여자들 (2)

그녀, 사랑 앞에 버림받다

◁전도연의 여자들 (1) 


스포일러: 강함



 <밀양>(2007)에서 전도연은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이자 신으로부터 외면당한 여자 신애를 연기한다. 다른 여자와의 외도로 남편을 이미 한 번 잃은 적이 있는 신애는 불행의 사고로 인해 남편을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 과부가 되어버린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와 새 출발을 하지만, 아들 준이 유괴를 당하면서 평화로울 줄로만 알았던 밀양에서의 삶은 또다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준 앞에 신애는 자신의 끈을 놓아버리고 만다.


 범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있던 그녀는 그러나 범인이 경찰의 보호 아닌 보호를 받게 되면서 복수의 대상을 잃는다. 종교적 믿음으로 마음의 분노를 간신히 떨쳐내고 범인을 용서해주기 위하여 교도소로 향하지만, 같은 믿음을 통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범인 앞에서 그녀는 용서의 대상마저 잃는다. 범인에게 복수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게 된 신애는 세상을 적대시 여기고 신에게 도전하는 이단아를 자처한다. 그녀는 버림받고 외면당하다 자신을 자해하기에 이른다.

남편, 세상, 그리고 신 앞에 버려진 신애

 신애가 비극을 감수한다면, <하녀>(2010)의 은이는 비극을 자처한다. 그녀는 현실을 벗어난 대저택이라는 공간 속에서 헛된 로망을 꿈꾸다 버림을 받는다. 대저택의 객식구가 되기 전 은이는 쓸만한 놈 하나 없는 세상에 권태를 느꼈고, 별 볼일 없는 남자를 택하기보다 성적인 고립을 자처했다. 언제나 여성 집단 속에서 생활해왔던 은이는 그러나 하녀가 됨으로써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매력적인 남자 훈(이정재)을 만난다. 매일 아침 피아노를 연주하는 훈 앞에서 은이는 사랑을 꿈꾸기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곳에서도 환멸감을 느낀다.

훈 앞에서 종종 방심한 모습을 보이는 은이

 평범한 남자들과는 다른 훈 앞에서 종종 방심한 모습을 보이게 된 은이는 별장에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한다. 이후 훈과 은이의 성적 매개는 대저택으로도 이어지고, 성적 해방감으로 은이는 훈에게 몸과 마음을 모두 바치기에 이르지만, 언젠가 훈이 늙은 하녀 병식(윤여정)에게 쥐어주었던 것과 같은 돈봉투가 피아노 위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고 좌절한다. 거기에 병식에 의해 은밀하던 관계가 파헤쳐짐으로써 달콤하기만 하던 은이의 사정은 수렁에 빠지고 만다.


전도연이다. 전도연이다. 전도연이다. -<무뢰한>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


 '전도연을 위한 영화'라고 일컫어지는 <무뢰한>(2014)에서도 그녀는 어김없이 버려진다. 잘 나가는 텐프로였던 혜경이 이 바닥 10년 동안 5억의 빚더미에 오르고 성남 마카오 단란주점의 퇴물 신세가 되어버린 것은 다름 아닌 남자 때문이었다. 준길(박성웅)과 혜경은 서로를 진심으로 뜨겁게 사랑했지만, 살인 전과자로서 경찰에게 쫓기던 준길의 처지는 그의 모습을 혜경 앞에서조차 감추게 했다. 결국 준길은 필요한 순간에만 그녀를 찾아 돈을 요구했고, 혜경은 그럴 때마다 이용당하기를 자처했다. 그리고 이러한 두 남녀의 관계를 형사 정재곤(김남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도무지 종적을 알 수 없었던 준길을 잡기 위해 재곤은 혜경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시작은 거짓이었다." -영화 <무뢰한>의 카피 중에서.

영준씨 사기꾼이죠?

네.

내가 더 사기꾼일지도 몰라요.


 이 영화의 묘미는 거짓으로 시작된 이들의 관계 속에 진심의 향방을 좀처럼 알아낼 수 없다는 점이다. 혜경과 영준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본명마저 숨기는 사람들이다. 정재곤은 형사 일을 위해 이영준이 되고, 김혜경은 업소 일을 위해 김혜선이 된다. 가짜로 살아가는 이들은 시종일관 저마다의 목적을 위하여 행동하는 듯 보인다. 이야기를 요약해보면, 1)재곤은 준길을 잡기 위해 혜경에게 마음을 빼앗긴 척하고, 2)혜경은 준길에게 보낼 3000만 원을 빚지기 위해 재곤에게 마음을 내보인다. 3)재곤은 혜경에게 3000만 원을 건네며, 4)혜경은 준길에게 3000만 원을 건네고, 5)재곤은 혜경을 추적하여 준길을 잡는 데 성공한다. 혜경은 재곤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결국 이용당한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렇듯 혜경과 재곤은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행동하는 듯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속일지언정 스스로를 속이지는 못했다. 거짓으로 시작하였지만 이들은 그 거짓 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흔들림을 겪었다.

"상처 위에 또 상처, 더러운 기억 위에 또 더러운 기억이죠…" -김혜경의 대사 중에서.

 처음 만날 당시, 이들은 홀로 남겨져 있었다. 재곤은 이혼한 상태였고 혜경은 의심과 초조함 속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충족에 불과한 관계 속에서 이들은 불현듯 사랑을 감지하게 되었다. 가짜로 시작했지만 가지고 있는 감정마저 가짜일 순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성적인 교감을 통해 공통된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나아가 서로의 마음을 떠보고 시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혜경은 재곤의 진심을 확인하지 못하고 망설이다, 결국 준길을 택한다.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재곤에 의해 혜경은 결국 사랑 앞에 버림받는 여자가 된다.


 <너는 내 운명>(2005)을 기점으로 전도연에게 사랑이란 좀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의 대상이 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비극이 결코 나약한 여성상을 내비치려는데 할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집으로 가는 길>(2013)에서의 전도연은 강인한 생존본능 그 자체다). 그녀들은 의존적이고 수동적이라기보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이다. 단지 너무나도 커다란 비극 앞에 조금 위태로울 뿐이다.


 <무뢰한>이 사랑 앞에 버려진 한 여자의 '하드보일드 멜로'를 이야기한다면, <밀양>과 <하녀>의 경우에는 버림받은 여자를 통해 다른 것들을 이야기한다. <하녀>는 인간답지 못한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아랫 여자’라는 의미의 '하녀'가 아니다.

은이에게 접근하는 훈

 대저택의 인물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성적인 갈망, 시기 질투와 치기, 돈에 대한 탐욕과도 같은 원초적인 차원의 욕구와 감정뿐이다. 훈은 여자를 성적 쾌락의 도구이자 번식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자이며,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가지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돈으로 입막음을 한다. 해라는 자식을 '애 키우기 고달픈 보통 사람들'과 구분 지어지기 위한 일종의 부의 상징으로 치부하는 자이며, 은이를 인간적으로 대하는 태도 역시 저 스스로를 높이기 위함이다. 장모는 오로지 돈에 의한 대우와 사회적 지위만을 중요시 여기며, 병식은 평생 동안 그들 속에서 인간됨을 잊은 채 살아왔다.


 결국 대저택이란 은이가 생각한 대로 현실로부터 탈피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보다도 추악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은이는 이들에 비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인물이었지만, 이러한 공간 속에서 그녀에게 결실이란 애당초 맺어질 수 없었다. 은이의 자살은 대저택의 번지르르함을 씻어내고 추악함을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복수다. 대저택의 인물들은 비록 내부로부터는 도망쳐 나왔을지언정 정상의 모습을 꾸며내는 데에는 실패한다.

밀양으로 가는 길에서 신애와 준, 그리고 종찬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토대로 하지만, 홀로 버려진 자의 방황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원작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소설이 화자의 아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면, 이 영화는 고통을 떠안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믿음이라는 행위에 의문을 재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매형, 누나 배신하고 딴 여자랑 바람났었잖아.

그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거야. 준이 아빠는 우리 준이랑 나만 사랑했어.


 신애는 진실과 거짓이 아니라 자신의 편의를 위해 믿을 것과 믿지 않을 것을 구분 짓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편의 불륜을 인정하려들지 않았으며, '비밀의 햇볕'으로 칭송하던 밀양의 햇살을 약사 앞에서는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종교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던 그녀는 배신 아닌 배신을 받고 ‘거짓말이야’하고 외쳤다. 신애가 믿었던 것은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었는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감독이 특정 집단의 반발을 무릅쓰고 <벌레 이야기>의 주요 소재를 그대로 차용한 것은 이러한 질문을 내던지기 위함일 것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신애

 도입부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신애의 모습 역시 이러한 믿음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녀가 서울을 떠났던 것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동네에서 조용하게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밀양은 서울보다도 말과 소문이 흉흉한 동네였고, 그런 곳에서 남편의 빈자리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컸다.


 그래서 신애는 위풍당당함을 꾸며냈다. 그녀는 과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생기와 활기로 동네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고, 받은 적이 없는 가짜 피아노 대회 상까지 자신의 학원에 내건 채 부동산 투자를 알아보러 다녔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삶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듯이. 신애는 처음부터 꾸며낸 모습 속에 자신을 숨긴 채 인도와 차도 사이에서 위태롭게 걷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남편과 아들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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