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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May 28. 2017

도심의 숲을 찾아서

제 14회 서울환경영화제(Green Film Festival)를 다녀오며

 언제부턴가 환경과 일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극지방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기후변화를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감하고 살았다. 그 날의 봄이 그 날과 다르게 느껴졌고, 옷차림은 한 주 사이에 눈에 띄게 얇아졌다. 여름은 예정보다 일찍 찾아왔다. 일찍이라기보다 순식간에 찾아왔다.


 봄옷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 대신 미세먼지용 마스크와 안경, 인공눈물, 공기청정기 따위에 돈을 허비하면서 살아가야 했다. '벚꽃엔딩'을 귀에 꽂고서 꽃구경으로 눈호강을 해야 할 시기조차 감각기관을 중무장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매일 아침 주요 관심사가 미세먼지였던 어느 날, 사람들은 생각했다. 어쩌다가 우리들의 봄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필름 위에 새싹이 돋아있다. '환경영화들을 통해 자연과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의미. -GFFIS 로고 소개를 참고.



제 14회 서울환경영화제, 개막식


 세상에는 크고 작은 여러 영화제들이 있지만, 모두에게 필요한 영화제는 좀처럼 드물다. 게다가 이 영화제는, 우리들이 기후변화를 체감하기 훨씬 이전부터 환경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올해로 14회를 맞고 있는 서울환경영화제는 생명과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의 시대에서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수많은 영화인들과 한 자리에 함께하는 것만으로 환경에 대한 경각심이 불러일으켜지는 느낌이었다.


 5월 18일이라는 의미 있는 날 열렸던 만큼, 개막식은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의 장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개막식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지난날의 한국을 되새김질했고, 권해효 배우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중의적인 말장난으로 웃음바다를 만들기도 했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유령의 도시>는 자연스럽게 1980년 5월 18일 당시의 광주의 모습과 겹쳐졌다.



서울환경영화제 트레일러 - 구교환∙이옥섭, <걸스온탑> (2017)

https://youtu.be/0GB4nH48Q2U

제 14회 서울환경영화제의 트레일러

 영화제 기간 동안 <걸스온탑>은 환경영화들의 상영에 앞서 스크린에 띄워지는 트레일러 역할을 맡았다. 천우희, 이주영이라는 배우의 매력과 구교환, 이옥섭이라는 감독의 시너지는 5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만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잔잔하게 미소 짓게 만드는 감독 특유의 유머는 수 차례 반복해서 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도 매번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 영화는 반려동물과 처음 만나던 순간의 애정과 책임지지 못한 마지막 순간의 슬픔을 아기자기하면서도 탄탄한 동화적 세계관으로 아름답게 표현한다. 시종일관 어긋나던 두 소녀의 대화는 그러나 처음과 달라진, 혹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서로의 안타까운 상황을 목격하고서 이어지고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우는 방향으로 향한다.



 서울환경영화제는 일주일이라는 기간 동안 이화여대 삼성홀과 아트하우스 모모 1관, 모모 2관에서 한 편의 트레일러, 37편의 장편 영화, 그리고 14편의 단편 영화와 함께 했다. '탈핵', '기후변화', '새로운 환경 운동을 위하여'라는 테마 속에서 자연과 환경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영화들 뿐만 아니라, 꿈꾸는 인간의 모습이나 이념체제개발 앞의 인간소외를 조명하는 등의 다양한 영화들이 고루 모여 스펙트럼을 넓혔다. 환경에 국한되지 않고 동시대의 여러 문제들을 다룸으로서 자체적으로 고립되지 않는 영화제가 될 수 있었다.


 좋은 기회로 참석하게 되어 영화제를 최대한으로 만끽하고자 하였고, 대략 열다섯 편 정도의 영화와 만날 수 있었다. 보고 느낀 감상을 아래의 네 가지의 테마로 묶어보았다.




빼앗긴 보금자리, 빼앗긴 일상.


마이크 데이, <고래의 섬, 페로> (2016)

 서울환경영화제 첫날, 개막식보다 먼저 예정되어있던 영화다. 페로섬의 사람들은 아주 먼 옛날부터 포경을 하고 바다새를 잡으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곡식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 위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개체수에 대한 문제로 동물보호단체에게 압박을 받아온 적이 있었지만, 평생에 거쳐 유지해온 생활 방식을 갑작스레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타지 사람들의 목소리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살아온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편을 택했다.

고래 사냥을 위해 해변가에 모인 페로 섬 사람들

 환경오염의 가속화로 바다는 정화능력을 잃게 되었고, 고래는 수은에 노출되어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수준이 되고 말았다. 페로섬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국 이들은 몸에 축적되어가는 수은 수치를 목격하고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오던 생활 방식과 일상을 모두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이 영화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감독이 선택지를 제시함에도 자신의 답안은 결코 내보이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서로의 입장 사이에서 '바름'이란 제대로 규정되기 어려웠고, 그럼에도 정답을 위하여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었다. 영화는 자기 스스로 정한 가치를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기에 앞서 진정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려준다. 환경에 있어서도 맹목적인 자세는 분쟁을 일으킬 뿐이다.


미셸 라티머, <레드파워의 눈물> (2016)

 다코타 엑세스 송유관 건설을 두고 벌어지는 원주민과 신진 아메리칸들의 싸움을 담고 있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저항과 이익창출을 위한 개발 사이에서 발발한 공방은 시위대 규모가 4500명에 달하면서 원주민의 승리로 돌아간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되찾고 예전의 평화로운 일상을 되찾지만, 정권 교체로 트럼프가 송유관 설치를 지지함으로써 간신히 얻은 평화를 또다시 빼앗기고 만다.


김형철유지영∙이승학, <가장, 자리> (2017)

행당 6구역에 들어선 신축 아파트

 이 영화는 개발에 관해서만 주야장천 목소리를 높여오던 한국 현실의 이면을 파헤친다. 게스트 토크 중 김형철 감독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돈이 되는 글에 주력하던 언론사들에 의해 강제 철거 문제는 등한시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고, 송경원 평론가는 9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어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주거 문제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겪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문제다.


 영화는 이를 시사하기 위해 사건의 진원지로 왕십리를 택한다. 카메라에 담기는 것은 가까운 줄로만 알았던 왕십리의 너무나도 먼 모습이다. 행당 6구역의 원주민들은 '가장 필요한 자리'를 빼앗긴 채 '가장자리'로 내몰려 살던 집뿐만 아니라 일상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간 경제 발전만을 위하여 닥치는 대로 달려왔던 한국 사회에는 멈추고 되돌아보는 자세가 진정으로 필요하다.




소외된 사람들.


매튜 하이네만, <유령의 도시> (2016)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던 <유령의 도시>는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IS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군사쿠데타로 장악한 독재정치가 30년간 이어져온 시리아에서 시민들은 평화적 시위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강제 진압은 많은 이들이 목숨을 앗아갔고, 주변국과 알카에다 무장세력이 반군에 합류하면서 시리아 내전은 끝을 알 수 없는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IS의 근거지 라카에서 RBSS('라카는 소리 없이 도살당하고 있다'는 의미의 시민 저널리스트 단체)는 목숨을 내걸고서 인간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 '유령의 도시'를 카메라에 포착했다.


 시리아 내전 속 극단주의 세력의 횅포는 인간의 존엄성을 마구 짓밟았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위하여 이다지도 잔인하고 추악해진 것일까. 그들은 마치 총을 든 광신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걸치고 걸친 이해관계와 무형의 종교, 무형의 이념 속에서 사람들은 소외된 채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닐스 클라우스, <비키니 워드> (2016)

 '한강의 기적'이라고 일컫어지는 한국의 고속성장 속에는 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었다. 공장화는 되었지만 기계화는 되지 않았던 시기, 기계의 역할을 대신하던 노동자들은 그러나 기계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다. 그들은 잠을 깨우는 '타이밍'이라는 약을 먹어가면서까지 철야 작업을 했음에도 왜 자기들이 이만큼의 돈을 받아야 하는지를 사업자에게 일일이 설명해야만 했다. '벌집' 혹은 '닭장'으로 불리는 조그만 공간에 살면서 목욕탕조차 마음대로 가지 못했다. 못다한 꿈을 이루기 위해 쉬는 시간 틈틈이 검정고시 공부를 하면서 열심히 살았지만, '공돌이'와 '공순이'로 불리며 노동자들은 언제나 괄시를 받았다. <비키니 워드>에 담겨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당대 노동자들의 참상이다.

결혼식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공돌이' '공순이'들은 정기적으로 교회에 모여 '합동 결혼식'을 올렸다.
지퍼를 내리면 뼈대만 남는 '비키니 옷장'은 노동자의 삶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기꺼이 희생하고 견뎌낸 수많은 노동자 덕분이었지만, 그들이 세운 공은 그러나 '당시에는 모두가 그랬다'라는 말 앞에 번번이 의미를 상실했다. 감독은 7∙80년대 한국 사회의 모습이 사실상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닐스 클라우스는 7분짜리 영화의 3부작을 기획 중이라고 했다. <비키니 워드>가 그 첫 번째 작품이며, 세월호 사건을 다루는 <마지막 편지>와 여성 입간판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플라스틱 걸스>가 그다음이었다. 통역가의 말처럼 '자민족 중심주의에서 떨어진 시각'으로 영화를 신선하고 담백하게 이끌어갈 줄 아는 닐스 클라우스의 다음 작품이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다비드 브렌스테인, <야나의 차이나드림> (2016)

이들은 건설 부지가 보여주는 싸늘한 현실을 그럴싸한 화려함으로 가까스로 가리고 있었다.

 과거 아메리칸드림은 성공을 갈망하는 많은 청춘들의 꿈을 지칭했다. 당시에는 미국으로만 가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공공연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차이나드림을 꿈꿨다. 그러나 그 꿈의 중심지에 사람은 없었다. 맹목적 개발과 거대 자본, 텅 빈 집들, 그리고 눈속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야나는 대규모 건설 사업이 진행 중인 도시로 뛰어들어 자신의 사업을 끌어나간다. 그녀는 외국인들로 이루어진 공연을 기획함으로써 건설부지를 찾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기 위해 애쓴다. 불나방처럼 화려함을 좇다가 위기에 빠져 좌절하고 결국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야나의 모습은 꿈을 짊어지고 젊음의 거리 뉴욕을 찾은 청춘의 모습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한 명의 소유자가 건물에서부터 상하수도 처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차지하는 '민영화 도시'라는 새로운 개념에서는 대륙의 스케일이 가감 없이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어김없이 존재하는 실패의 씁쓸함을 영화는 야나의 눈물을 통해 표현해낸다.




제리 로스웰, 인간을 조명하다.


제리 로스웰, <익명의 정자 기증자> (2010)

익명의 150번 정자 기증자, 제프리 해리슨

 가장 많이 기대하고 있었던 작품이었고 그랬던 것만큼 여운도 길었던 영화다. 영화는 정자은행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조엘렌이 자신의 형제와 익명의 정자 기증자를 찾으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기증자 번호를 입력하면 기증자의 정자로 태어난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인터넷 사이트를 거쳐 [뉴욕 타임스]에 보도 기회를 얻고 열두 명의 형제자매를 찾는 데에 성공한다. 이들은 나고 자란 환경이 전혀 달랐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형질 덕분에 서로의 비슷한 부분들을 발견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익숙하지 않은 가족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조엘렌의 형제자매들은 너무나도 밝고 명랑하다. 제프리 해리슨과 친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평범하지 못하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해질 이유는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고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는 기술의 진보 속도에 견줄 만큼 빠르게 생성되고 있다. 날 때부터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앞에 이토록 명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녀들은 사회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미혼모라는 사실에 떳떳하려고 했고, 아이들을 속이려고 들지도 않았다. 다르다는 특별함은 인식의 전환을 맞이하는 순간 불행으로 치환되지 않는 힘을 얻는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제리 로스웰, <타짜의 와인> (2016)

 와인을 즐기는 일에서 나아가 희귀본을 수집하고 판매하는 일은 사교계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취미이자 지위를 뽐내는 방식 중의 하나다. 입소문을 탄 와인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로 책정되어 경매되고 있으며, 소모품이라는 특성상 가격은 경매가를 계속해서 갱신해가며 최고치를 찍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들 중에서 와인을 진정 즐길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고상하고 우아하기만 하던 그들만의 리그에 어느 날 루디 쿠니아완이라는 수수께끼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와인에 대한 넓은 식견으로 테이스팅을 할 때마다 와인의 라벨과 생산연도를 모두 맞춤으로서 상류 사회 속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금세 사로잡고 칭송받는다.

와인 창고에서 시음 중인 상류층 사람들

 루디는 곧 가짜 와인을 제조하고 최상품의 가격으로 판매하는 사기꾼으로 판명됐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루디의 만행을 용서했고 누군가는 법원의 판결을 부정했다. 왜곡된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루디 덕분에 희귀한 와인을 갖게 되었다는 믿음을 유지했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지위가 여전히 상류 사회에 속해있음을 증명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감독은 진실이란 무엇이며, 루디는 영웅인가 아닌가에 대한 균형을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루디는 자신의 만행으로 살인보다도 높은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보다 더한 방식으로 더 많은 이득을 취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단지 '노래가 멈출 때 미처 자리에 앉지 못하였'기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루디는 악랄하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기보다, 그저 진정으로 와인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진정한 의미의 애호가였던 건지도 모른다.




조셉 빌스마이어, <운명의 산 낭가 파르밧> (2010)

 이번 영화제에는 울주세계산악영화제의 작품들도 함께했는데, 이 영화가 그중 하나였다. 어렸을 적부터 라인홀트-건터 형제는 히말라야의 악명 높은 봉우리 낭가 파르밧을 정복하고 싶은 남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어른이 되어 낭가 파르밧 등반 기회를 얻게 된 형제는 기상 악화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등반을 실행에 옮기고 결국 정상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의 소망을 당당하게 거머쥔다.


 영화에 중심적으로 담기는 것은 정상 등반이라는 하나의 꿈이 아니라 그릇된 야심을 품은 인간의 욕망이다. 낭가 파르밧 아래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야망 아래 부정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형제는 정상 등반이라는 자신들의 목표만을 바라본 채 팀의 리더 칼의 지시에 불응하고 동료들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인다. 개인의 쟁취로 변질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형제를 가로막기 바쁘던 칼은 캠프 기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되자 팀의 목표를 어떻게든 성취하기 위하여 이제까지의 자신의 신념을 외면하고 만다. 형의 그늘에 번번이 가려지며 열등감을 느끼던 건터는 스스로 무리한 투쟁을 자처하고 목숨을 잃기에 이른다.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야망을 시사한다면, 그 이후에 보이는 것은 야망의 대가다. 훗날 라인홀트가 그랬듯 낭가 파르밧은 그저 지명일 뿐이다. 거기에 감정을 운명을 집어넣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낭가 파르밧에서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라인홀트-건터 형제




아이들과 우리들의 세상.



김세미∙이정준, <소녀와 난파선> (2017)

 이 날 상영관에는 김세미, 이정준 감독과 영화의 주인공 김하늘담은 작가가 함께 했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들은 울고 웃으며 이제까지의 여정에 대해 털어놓았다. 김세미 감독은 난파선이라는 주인공으로부터 시작하는 유미적인 작품을 기대하고 작품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찾아온 너무나도 큰 비극 앞에 아름다움이란 그저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여질 수만은 없는 운명이었다.

물 속에서 난파선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는 화가, 그리고 김하늘담은

 소녀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지 사십여 년이 된 난파선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을 보았다. 난파선은 사람들에게 잊히는 긴 세월을 걸쳐 해양 생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제2의 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넓은 바다는 소녀에게 무궁한 생명을 보여주었고 살아있음을 스스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이 벌어졌고 소녀는 한 동안 바닷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는 박동하는 생명 대신 쓸쓸함과 울적한 푸름(blue)만이 가득했다. 춥고 싸늘한 어느 겨울날 소녀는 얼어붙은 강 속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서마저 살아 숨 쉬며 제 몸을 반짝이는 생명체를 목격하고 소녀는 다시 바다로 들어갈 용기를 얻는다.

난파선에서 열린 수중 전시회

 영화는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이야기하는 법을 터득한다. 한 소녀의 성장기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사실상 비운의 사건 앞에 좌절하고서 마음 언저리에 고인 진물을 쉽사리 씻어내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성장기다. 잊을 수 없는 일을 영화적 소재로 소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거둔 수확은 대단하다.


왕 지우 리앙, <플라스틱 차이나> (2016)

폐  플라스틱 수입국, 중국

 국제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하게 된 이 영화는 눈부신 성장으로 만국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중국의 이면을 담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쏟아지는 폐 플라스틱 자재을 수입하고 있는 중국의 민낯에 화려하고 풍요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쿤과 펭은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폐자재로 달려든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임에도 수입은 턱없이 부족하고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폐 플라스틱 속에서 끼니를 떼우는 두 가족

 썩어 악취를 풍기는 플라스틱 더미에는 언제나 파리 떼가 들끓고 있지만, 이들은 그 한복판에서 자연스럽게 생활을 이어간다. 플라스틱을 태워 밥을 짓고 플라스틱 더미 속에서 식사를 하고 잠을 잔다. 플라스틱을 세척한 물로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을 씻으며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장난감을 찾아 가지고 놀거나 오염된 강변의 죽은 물고기들을 주워와 간식으로 먹기도 한다. 마을을 떠도는 양들은 위 속에 플라스틱을 가득 채운 채 죽어가고 있지만, 어른들은 오염된 환경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존 웹스터, <너의 작은 노란 장화> (2017)

먼 미래, 새로 생길 해안선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너'

 먼 미래, 해수면은 상승해있고 우리들의 추억 속의 공간들은 모두 물속에 잠겨있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증손녀에게 영화의 화자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평생에 걸쳐 살아온 집과 어릴 적 뛰놀던 운동장, 일생의 기억을 모아둔 사진 앨범까지 모두 수면 아래로 사라져 버린 지구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감독은 '너'라는 지칭을 통해 화자와 청자, 전달하는 사람과 전달받는 사람을 연결하여, 기후변화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 속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임을 시사한다. 개인의 힘은 너무나도 약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마틴 루터킹과 간디조차 한 명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영화는, 지금까지의 영화들 중에서 환경이라는 테마에 가장 적합하게 보였다.





폐막식, 제 15회 서울환경영화제를 기다리며


 국제환경영화경선에서 대상은 <플라스틱 차이나>, 심사위원 특별상은 <시린의 노래>, 뿌까 관객상은 <앵그리 이누크>가 차지했으며, 한국환경영화경선에서 대상은 <개의 역사>, 우수상과 뿌까 관객심사단상은 <올 리브 올리브>가 차지했다. <플라스틱 차이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관람하지 못한 영화였고, 마음속에 찜해둔 영화들이 번번이 수상하지 못해 조금 아쉬웠다.


 영화제 기간 동안 존경하는 분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시는 많은 분들을 새로 알게 되었고, 기후 변화와 같은 환경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을 넘어서 직업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다양한 것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서로를 응원하고 축하해주는 감독과 배우와 평론가들을 보고 있자니 시너지를 내뿜는 그들만의 커뮤니티가 너무나 부러워졌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의 영화제가 끝나고서, 한참 아쉽고 허전했다. 환경영화제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 설레었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영화를 보고 싶었고, 그래서 하루 동안 다섯 편의 영화를 보기도 하였다. 더 많은 영화를 볼수록 환경과 영화에 대하여 더 많이 관심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관람수가 늘어갈수록 작품을 점점 더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영화제가 끝나고부터는 날이 계속 좋다. 하늘은 더 푸르러지고 잎사귀는 더 건강해졌다. 놓친 영화들도 많고 아쉬움도 많이 남은 영화제였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좋은 경험이자 추억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뭐랄까, 내년에는 멋진 영화인들의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있다면 더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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