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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Jun 21. 2017

자조에 찬 '악녀'의 미소

정병길 감독의 <악녀>

스포일러: 강함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정병길 감독이 보여주었던 반전은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당시 '만화책을 넘기듯 빠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던 감독은, 거기서 더 나아가 FPS게임 프랙무비를 보는 것 같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바로 영화 <악녀>다. 


 <악녀>는 수많은 영화들의 장면들을 오마주로 삼고 있다. 배기통로로 연기가 주입되는 기도원은 <올드보이>를 연상시키고, 침대 밑에서 살해 현장을 목격하는 장면은 <킬빌>을 떠올리게 한다. 절뚝거리던 다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식스센스>를 닮았으며, 숙희와 현수의 결혼생활은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를 보는 듯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내내 신선하다. 감독의 연출이 새로운 액션을 탄생시킨 덕분이다.


https://youtu.be/CW5oGRx9CLM

더 위캔드(The Weeknd)의 'False Alarm' 뮤직비디오

 <악녀>가 택하는 액션은 미국의 유명한 팝스타 더 위캔드의 ‘False Alarm’ 뮤직비디오의 그것과도 같다. 주인공은 시작과 동시에 카메라 바깥으로 내몰리고, 관객은 의문의 인물의 시각을 통해 사건의 현장을 따라간다. 그러던 중 헬스클럽의 거울에 주인공의 모습이 반사되고, 관객은 비로소 숙희(김옥빈)와 만나게 된다. 1인칭 시점의 카메라 워크는 극적 긴장감과 현장감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감정선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는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다이후 영화는 일반적인 영화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고 다인칭 시점을 활용하기도 하면서 숙희가 카메라 뒤에 소외되지 않게끔 균형을 맞춰나간다.

  

영화 <악녀>의 스틸 컷

 <악녀>는 이미 수많은 영화 관계자들에 의해 '악하지 않은 인물이 악녀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정의 내려진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와 달리 악인이 되어가는 숙희의 모습은 영화 속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살인 자체를 무고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숙희의 살인은 소중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자들에 대한 복수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죽음을 죽음으로 갚아주고자 했던 그녀만의 방식을 단순히 악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악녀로 불리게 되었을까.


 영화에는 숙희가 경찰들에게 둘러싸이는 장면이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 장면은 중상(신하균)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 직후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눈 앞에서 생생하게 목격했던 어린 숙희는 중상 덕분에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공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주검으로 돌아온 중상 앞에서 숙희의 복수심은 꺼질 틈이 없었다. 그녀는 적들의 아지트에 들어갔고 일흔 여번의 살인을 감행했으며 끝끝내 경찰에 포위됐다. 더 이상 남은 것도 바랄 것도 없었던 숙희는 경찰에게 순순히 자신의 손목을 내어줬다.


영화 <악녀>의 스틸 컷

 두 번째 장면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 직후의 일이었다.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 숙희는 이제까지 복수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결코 복수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적도 중상의 원수를 갚은 적도 없이, 권숙(김서형)에게 이용당해왔듯 중상에게도 똑같이 이용당해왔을 뿐이었다. 너무나도 큰 배신감과 함께 숙희는 자신을 속여온 장본인이자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 중상을 죽였다. 이로써 그녀는 복수라는 일념을 끝끝내 지켜냈는가. 경찰에게 처음 붙잡혔을 때와 달리 그녀는 자신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무자비한 킬러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숙희는 악을 택해서 악녀가 된 것이 아니었다. 복수에 눈이 먼 나머지 진실이 흔들려버린 상황 속에서도 살인을 감행했고, 그렇게 저도 모르게 악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숙희는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못한 채 속아 넘어간 자기 자신을 그저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엔딩씬에서 보인 숙희의 웃음은 악인의 탄생을 암시하는 악마적 웃음이라기보다 자조(自嘲)에 불과했다.


영화 <악녀>의 스틸 컷

 <악녀>의 액션신은 별도의 공간이 아니라 관객이 흔히 접하는 일상적인 공간들에서 벌어진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보이는 액션신은 낯설면서도 내내 새로운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헬스클럽이나 마을버스와 같은 공간은 자칫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카메라 워크의 위화감을 덜어주며, 이와 반대로 분절되어있는 내부의 공간은 롱테이크가 안길 지루함 대신 숙희의 혼란함과 당혹스러움을 관객이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촬영기법과 공간 연출이 빗어낸 시너지는 가히 놀라운 수준이다.


 화사한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숙희는 환풍구를 통해 총을 들이밀었다. 이는 결코 평범해질 수 없는 숙희의 운명을 아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려버린 순간 감행은 만행으로 치환된다. <악녀>가 킬링타임용으로 그치지 않는 이유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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