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역사를 다루는 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철저한 고증에서 비롯된 재현과 작가적 상상력으로 채워 넣은 각색이 바로 그것이다. <왕의 남자>(2005), <사도>(2014), <동주>(2015)를 거쳐오며 두 측면에서 모두 뛰어난 연출력을 보여왔던 이준익 감독은, <박열>(2017)에서 모두가 등한시하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최초의 진술을 시도한다. 진정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하여 픽션은 최대한으로 베재되었다. 인물 묘사에서부터 장면 장면의 디테일한 부분들, 심지어는 비공개로 진행된 재판정에서의 일화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고증에 입각한 사실만이 영화에 채워졌다. 드라마틱한 전개도 과장된 감정선도 없이, 감독의 신작은 내내 진솔하고 담백하기만 하다.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러한 연출이 가능했던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한 편의 영화만으로 역사 속에 가려진 당대의 모습을 모두 이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번 글에서는 영화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키워드들을 간략하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본고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비전문적인 해석 혹은 첨언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박열>의 배경이 되고 있는 1920년대는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일본의 급진적인 근대화∙도시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서양풍의 질 높은 문화생활이 대중화되어 당시 일본인들은 양장(洋裝)을 즐겨 입으며 ‘모던보이’와 ‘모던걸’로 불리기를 선호했다. 서양식 소비문화는 관습과 구분되는 문명인으로서의 자질로 치부되었고, 미츠코시 백화점은 급격한 변화를 맞은 일본인들의 삶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영화∙레코드∙재즈 댄스∙여성의 숏컷 등 서양문화와 서양 음식이 일상에 깊게 뿌리를 내렸으며, 이 시기의 일본인들은 영화에서 묘사되듯 밥 위에 우메보시를 대신하여 피클을 얹어 먹기도 하였다.
일본인들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문명인으로서의 자질’에 지나치게 의식한 것은 관동대학살을 비롯한 이제까지의 만행에 대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진재일기]에는 1923년 당시의 무자비함이 적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일본도를 내리칠 때의 맛, 내리친 목의 상태’와 같은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국제사회의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일본은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세계 질서에 부합하는 '문명국 이미지'를 고취시키려고 했다. 자국의 만행에 대해서는 일절 외면하였는데, 관동대학살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는 '유감의 뜻을 표명할 예정이 없다'라고 답변했다.
1923년 9월 1일, 일본의 관동지방 남부에서 진도 7.9의 규모로 발생한 관동대지진은 현재까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지진 피해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지진은 도쿄와 요코하마 지역의 3일간의 화재로 이어져 벽돌 양관을 잇따라 붕괴시켰다. 전 시가지가 소실 및 반파되면서 이재민은 약 340만 명에 육박했고 사망자만 9만여 명에 달했다. 천재지변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 일본을 말 그대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삶의 터전을 모두 잃어버린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너무나도 큰 불행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멍하니 앉아서 하늘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이들은 하늘이 아닌 땅에서 적수(敵手)를 찾았다. 일본인 사이에서 혼란을 말미 삼아 우물에 독을 퍼뜨리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조선인 유언비어가 퍼져 나왔고, 이는 곧 백주 대낮의 공공연한 살인으로 이어졌다. 조선인 폭동은 기정 사실화되어 계엄령이 발포됐으며, 군대와 경찰, 그리고 시민 경찰 자경단이 혼연일체 되어 조선인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했다. 소재지에서는 총성과 폭음, 비명이 당연하게 울려 퍼졌으며, 이 사건으로 조선인 7천 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고한 조선인들에게 관동대지진은 천재(天災)가 아닌 인재(人災)였다.
관동대학살은 원망에 차 있던 당시 일본 시민들에 의해 벌어진 만행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일본 관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정황상의 증거가 여럿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영화가 시간을 할애하여 묘사하고 있는 부분 중에 하나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었으므로 시민 경찰의 주도적인 조선인 검문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관헌이 제시한 식별 자료였다. 이 자료에는 조선인의 외견상의 차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들과 더불어 ‘15엔 55전’이라는 발음을 통한 구체적인 조선인 식별 방법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사건이 일단락된 이후, 고토 경무국장은 외부 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조선인의 귀국을 정책적으로 금지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관동대학살이 단순한 노여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적 정책 중의 하나였음을 반증해준다.
아나키즘은 20세기 초까지 범지구적으로 팽배하던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된 무정부주의 사상 및 운동으로, 제도화된 정치 조직, 권력, 사회적 권위를 모두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상의 가치로 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하여 주창하는 아나키즘은 신문과 잡지를 통해 보도되어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대한민국의 혁명운동을 이끌어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3.1 운동이라는 역사의 현장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함께했던 박열 역시 아나키스트 중에 한 명이었다. 일본에서는 자유민권운동과 사회주의로부터 아나키즘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아나키스트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개인화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뜻을 같이하는 자들끼리 모여 집단활동을 했으며 이를 '코뮨'이라고 불렀다. 박열을 중심으로 구성된 '불령사' 역시 조선인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코뮨이었으며, 영화의 초중반부에 걸쳐 불령사의 모습이 아주 세세하고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당시 천왕제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근대국가를 확립해나가던 일본에서, 신적 존재로 여겨지던 천황을 인간시 대하는 조선인 박열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파격이었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였음을 연이어 강조한다. 감독의 이전 작 <동주>에서만 해도 실존인물에 버금가는 존재감을 내뿜던 이여진과 후키다 쿠미와 같은 가상인물은 <박열>에서 단 한순간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로지 명명백백한 사실만을 묘사하는 영화의 장면들은 또 하나의 기록이자 사료(史料)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역사에 기반한 작품들을 잇따라 연출해오면서 어느새 감독은 역사적 사명감을 너무 많이 의식하게 된 듯하다. 혹은 감정적으로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를 터뜨리는 그간의 연출 방식에 매너리즘을 느끼거나, 취지와는 달리 역사적 사실이 그저 소재로 소모되어 버리는 상황에 스스로 환멸감을 느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박열>은 이제까지의 필모그래피에서 이준익 감독이 보여주었던 것들과는 좀처럼 질감이 다르다. 가늠의 척도를 어느 것에 두느냐에 따라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지만, 영화감독으로서 펼쳐보였던 테크닉이 상당 부분 휘발되어버린 듯한 느낌은 쉽사리 가시지 않는다.
만일 역사 현장의 재현을 목적으로 한다면, 영화 자체가 교과서적으로 함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대로의 정보 전달에서 그친 이 작품은, 철두철미한 고증이 거두어 낸 영화적 수확일까, 미디어로서의 기능만 남은 시청각물의 퇴보일까.
∙참고문헌
1. 이은례, 비교일문학 - 1920년대 일본문학과 소비문화, 2010, p.80-84
2. 강덕상, 1923년 관동대진재 대학살의 진상, 역사비평, 1998, p.58-81
3. 유병관,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제국주의 비판과 일본 아나키즘의 수용과정, 2009
∙이미지 출처: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