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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Jul 13. 2017

모든 것이 지난 '그 후'

앤딩은 오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이 언제나 ‘나’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이고, 내 인생의 주인은 또 당연하게 나여서, 내가 없으면 곧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유년 시절. 문득, 나 하나쯤 없어져도 세상은 잘만 돌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어른이 된다는 의미를 생각한다. 아직 한없이 나약하지만 누구나 겪는 일이기에 의연해야 하는, 그래서 더 서러운.



        밋밋한 제목이 특색이라면 특색인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명이 그 이름 그대로 홍상수 감독의 것이 되었다. 작명에 타고난 그가 고민 끝에 선정한 이번 영화 제목은 <그 후>다. 영화의 인물들이 내게는 모두 조연의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중심이 날아가버린 자리에 밋밋하게 남겨진 채.








        영화의 첫 장면. 봉완(권해효)의 집이 새벽 네 시의 광경으로 잡힌다. 긴 세월 한 자리를 지켜온 가구들이 삶의 동선에 따라 벽면을 등지고 서있다. 몸에 익은 위치에 오래된 버릇처럼 놓인 사물들이 프레임에 담긴다. 선반에 취미와 취향이 놓여있고 의자에 일상과 주의(主義)가 걸려있다. 이른 아침을 먹는 봉완 앞에서 아내가 재잘댄다. 이들이 생동하는 순간은 모든 것이 긴 시간에 걸쳐 자리를 잡은 ‘그 후’다.



        이번에는 멀리서 뛰어오는 봉완의 육신이 잡힌다. 어린아이처럼 보드랍지도 스무 살 청년처럼 얄팍하지도 않은 몸, 노목이 몸을 불리듯 나이테가 층층이 퇴적된, 투박지고 단단한 몸. 그런 육신에서 액화된 감정이 주름을 타고 흐른다. 그가 통곡하는 순간은 유연하지 못한 단단함이 끝내 뚝, 하고 부러지고 만 ‘그 후’다.



        과거이기도 현재이기도 한 봉완의 출판사로 세 명(혹은 네 명)의 여자가 드나든다. 테이블 위에는 섬세하던 어느 여직원이 두고 떠난듯한 디퓨저가 숨을 죽이고 놓여있다. 갈등이 피어나는 순간은 층층이 쌓아 올린 과거의 무게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그 후’다.







        인생에서 일구어낸 것들은 차곡차곡 쌓여 봉완의 환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글을 쓰고 평론가가 되고 출판사를 차리기까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가정을 차리고 딸아이를 낳기까지, 지난날은 그의 집과 직장, 하물며 그의 몸에까지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가장'이라는 타이틀은 봉완을 이내 '가장자리'로 내몰았고, 다른 여자의 어깨를 빌림으로써 그는 중심을 다시 꿰차려 했다. 하지만 ‘해피앤딩’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 후’가 찾아왔다.



        자처한 것들을 기억하는 이 남자는 자기연민의 늪에 빠져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감독은 그런 인물을 위하여 망각이라는 축복을 선사한다. 봉완은 출판사를 다시 찾은 아름(김민희)을 한참 동안 기억하지 못한다. 아름은 택시 안에서 쏟아지는 눈송이를 보며 하루 종일의 수난을 잊는다. 비로소 그들은 환하게 웃는다.




        홍상수 영화에는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인생이 보이는 것 같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기억할만한 것들을 쌓아 올리면서, 찌질한 것들을 망각하면서.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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