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오종, <프란츠>
스포일러: 보통
꽃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 저 멀리 색채가 없는 도시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 1919년 독일의 중부 도시 크베들린부르크다. 제1차 세계대전은 4년 간 지속되었고, 전사자 시체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텅 빈 눈으로 텅 빈 관을 땅 속에 묻었다. 그러느라 허기가 졌고, 배를 채우기 위해서는 다시 일터로 나가야 했다. 식욕이 채워지자 이번에는 수면욕과 성욕이 몸속 어딘가에서 찾아왔다. 이전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꿰찼다.
먹고 마시는 사람들과 구애하는 남자들 사이에 메마른 표정의 여자 안나(파울라 비어)가 있다. 그녀는 전쟁으로 남편 프란츠(안톤 폰 루카)를 잃고 시부모와 남은 생을 살아가고 있는 과부다.
안나는 남편을 기억하면서 살기를 자처한다. 프란츠의 아버지 호프마이스터 박사가 안타까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를 소개해주지만, 그녀는 남편을 잃은 아내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자신의 지조를 지키려 든다. 하지만 안나 역시 욕구와 욕망을 품은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이란 언제까지나 결핍하는 것들을 충족시키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프란츠의 묘비 앞을 지키는 것은 안나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여느 때처럼 몇 송이 꽃다발을 들고 묘지를 찾은 어느 날, 안나는 남편의 묘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의문의 남성을 목격한다. 프랑스 국적의 그 남자를 바라보며 안나는 지난날 프랑스 문학에 빠져있던 남편을 연상한다. 전쟁 이전의 남편의 친구로 보이는 그를 안나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관찰한다. 그의 이름은 아드리엔(피에르 니니). 프란츠를 잊게 만들려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아드리엔은 그녀로 하여금 남편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들었다.
<프란츠>가 드디어 국내 개봉을 맞았다. 베를린 영화제, 토론토 국제 영화제 등에서 그 영향력을 인정받은 프랑스 영화감독 프랑수아 오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다. 데뷔 이래 긴 공백기 없이 작업활동을 이어온 그는 현재까지 총 26편의 영화를 발표한 상태다. 이는 거의 1년에 한 편 꼴이다.
감독의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시작과 동시에 형성되는 팽팽한 성적 긴장감이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2014)가 감추어져 있던 성적 자아를 표출시켜 두 남녀의 미묘한 사적 관계를 이야기한다면, <영 앤 뷰티풀>(2013)은 열일곱 소녀의 매춘을 소재로 확립되지 않은 자아의 흔들림과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포착해낸다. 고교생과 문학 교사의 일화를 다루는 <인 더 하우스>(2012)는 소설 창작이라는 매개로 두 인물의 신분적∙지위적 경계를 허물어뜨림으로써 서스펜스적 에로티시즘을 자아낸다. 성적 긴장감으로 하여금 이야기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은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주특기다. 그의 작품은 거의 매 순간 치명적이다.
물론 그의 작품들이 포르노그라피적 성향을 보인다는 것은 아니다. 감독이 형성해내는 성적 긴장감은 언제나 이야기를 흥미롭게 가미하지만, 거기에는 핵심이 되는 무언가가 엄연하게 존재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있다. 로리타적이고 퀴어적인 요소들은 그 곁가지일 뿐이다.
<프란츠> 역시 이제까지의 작품들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영화에는 아드리엔을 만나고부터 피어오른 안나의 욕망이 중점적으로 표현되지만, 플래시백으로 묘사된 프란츠와 아드리엔 사이의 관계 속에서도 미묘한 성적 긴장감이 형성된다. 두 남자는 전언에서 비롯한 상상과 연상의 방식으로 존재하며, 이와 같이 확고하게 정의되지 않은 인물 간의 관계 속에서 프랑수아 오종의 주특기는 또 한 번 빛을 발한다. 그리고 감추어진 바로 그 관계 속에서 영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를 이룬다.
프란츠는 내 유일한 아픔이에요.
-아드리엔의 대사 중에서.
다만 시대극으로써 <프란츠>는 섹슈얼적인 측면에서 위의 작품들과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 패전 국가의 도시를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은 극도로 자제되고, 이는 영화 전반에 걸친 흑백 화면으로 표현된다. 색채가 없는 시공간 속에서 성적 긴장감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안나는 그저 매일같이 프란츠의 묘비 앞에 앉아 젊음과 아름다움을 허비할 뿐이다. 그곳으로 아드리엔이 찾아오는 순간, 하나의 씬을, 나아가 시퀀스 전체를 컬러 화면이 차지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컬러 화면은 욕망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이는 톰 포드 감독이 <싱글맨>에서 색조를 활용하던 기법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자제되던 안나의 욕망은 아드리엔의 등장과 함께 제법 순조로히 빛을 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안나 스스로 본인의 감정을 확인하는 순간 감추어져 있던 진실은 베일을 벗고, 안나와 아드리엔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벌어지고 만다. 배려를 명분으로 시작된 선의의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고, 이들의 관계는 바로 그 거짓말 속에서 유예된다. 덕분에 아드리엔은 프란츠와 안나를 알아가고 안나는 아드리엔을 알아가지만, '선의'는 어느새 휘발되고 그곳에는 '욕망'만이 남는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프란츠를 둘러싼 안나와 아드리엔의 거짓말에 대한 영화다. 이들의 관계는 거짓말로 시작되어 거짓말로 끝난다. 과부로서의 명분을 지키며 도덕적이고 모범적인 여성으로 평생을 살아가려던 안나는 욕망의 열병에 사로잡힌 자신의 육신을 강물에 내던진다.
프랑수아 오종은 언제나 자신의 작품을 통해 신념과 본능 사이에서 시종일관 흔들리는 인물들을 포착해낸다. 선택의 기로 앞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후자를 택하지만, <프란츠>의 안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안나와 달리 파국을 맞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자살] 앞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러니까 결국 안나는 프란츠라는 이름의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내뱉으며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속이고 모른 체한다. 감독은 그런 그들을 위해 긴 여정의 끝에 남다른 해피앤딩을 선사한다. 그의 영화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유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