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찾아낸 진실, 진심이 일궈낸 <재심>
스포일러: 보통
현우(강하늘)와 준영(정우)은 본질적으로 선한 인물이다. 평범한 시골 청년 현우는 억울한 누명에 씌어 감옥살이를 하였고, 빽 아닌 노력으로 변호사가 된 준영은 가족을 위해 돈과 유명세를 좇는 기회주의자로 전락했다. 전형적인 나쁜 놈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이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공통점을 가진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학창 시절에는 책을 멀리하던 동네의 양아치로, 지금은 돈에 얽매인 채 가까스로 살아가는 어른으로. <재심>을 통해 감독은 동질감에서 출발하는 두 남자의 다른 방식의 우정을 그린다.
<재심>은 오로지 배우들 만으로 화제가 되었던 한국의 여러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쎄시봉>과 <동주>의 연이은 흥행에 힘입어 스크린 배우로 자리매김한 강하늘과 <도둑들>, <암살>, <아가씨>의 씬 스틸러 김해숙이 사건의 진원지에서 억울한 누명을 씐 모자의 역할을 맡는다. 정우와 이동휘는 <응답하라 시리즈>에서의 유머러스함을 그대로 가져와 사건의 외각에서 대형 로펌의 변호사 역할을 맡는다.
스토리가 스토리인 만큼 <재심>은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대거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관객이 현재 영화가 구현하는 현실보다 더 비현실적인 현실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상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안기기란 애초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영화의 현실보다 한국의 현실이 아직까지는 더 재밌는 실정이다. 때문에 감독은 영화 속 사회의 실태를 강조하는 데에 씬을 할애하지 않고 다른 길을 택한다. <암살>, <내부자들>에서 악인을 맡았던 배우 이경영이 로펌 대표(필호)의 자리를 맡고 있으나, 이 영화에서 필호는 악인으로서 좀처럼 활약하지 않는다. 불량 경찰과 부패 검찰이 그 자리를 꿰차고 있지만 이들의 모습 역시 어딘가 허술하다. 그 말인즉슨, 부패한 현실을 비난하는 것은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현우는 같은 다방에서 일하던 연서를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길에 택시 기사 살인 현장을 목격하고, 수사 경찰에게 본 그대로를 정확하게 진술한다. 그러나 악랄한 형사 철기의 덫에 빠져 구타와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강요당하고 10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다. 현우가 출소한 즈음 준영은 가택에 차압 딱지가 붙어 가족과 함께 길바닥에 내몰릴 위기에 놓인다. 친구 창환의 로펌 테미스로부터 현우의 사건을 의뢰를 받은 준영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공소 시효가 끝나가는 현우의 사건에 손을 댄다.
이 영화에서 사건은 우연으로 시작된다. 짝사랑하던 연서가 다방 사장에게 학대당하던 곳에 함께 있던 현우가 연서를 우발적으로 구해주고, 늦은 시각에 사건 현장을 우연히 지나가게 된다. 라이터를 켜다가 오토바이가 넘어지고, 현우는 지나칠 수도 있었던 사건을 기어이 목격한다. 빚더미에 올라 닥치는 대로 의뢰를 받던 준영은 우연히 현우의 도시를 방문한다. 비협조적인 현우 모습에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준영은 그러나 자동차 타이어에 펑크가 나면서 어쩔 수 없이 현우의 사건을 맡는다. 법에 대한 회의감 속에 변호사 준영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현우는, 무단결석 100일을 넘긴 준영에게 담임이 했던 ‘준법정신을 지켜라’라는 말 한마디에 동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돈만 밝히던 변호사 준영과 모두가 수군대는 법에 의한 살인마 현우는 이렇듯 우연을 통해 인연을 맺기 시작한다.
재심의 현장보다 재심까지의 과정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재심청구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일 것이다. 준영이 현우의 사건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온갖 부정부패는 가감 없이 폭로된다. 사건 검토 도중 현우의 무고함을 알게 된 준영은, 현우가 가졌던 억울함과 하나뿐인 아들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의 분통함을 진심으로 이해한다. 오로지 돈만 바라보고 달려오던 이 물질만능주의자는 썩어빠진 세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한다. 그리고 그 진심 어린 감정 속에서 변화하기 시작한다.
현우와 준영은 재심청구를 인정받는 마지막까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현우가 또다시 법에 회의감을 느끼고 사무치는 복수심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려고 할 때마다 준영은 현우가 실제 범죄자로 전락하지 못하게 막는다. 현우의 전재산이 담긴 돈 봉투는 돈 앞에 흔들리는 준영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서로에게 의지한 채 이들은 잘못 끼운 첫 단추를 향해 끝까지 투쟁하고, 모두가 기각될 거라 단정했던 재심청구가 시작된다. 부패에 찌든 사회 속에서 정의를 실현하게끔 하는 것은 바로 이들의 진심 어린 마음이다.
영화가 부패한 사회를 꼬집을 때 희열과 통쾌함을 맛본 관객은 극장을 나와 현실의 부패에 직면하는 순간 또다시 좌절하고 만다. 이들에게 영화는 소비적이고 소모적인 오락에 다름 아니다. 능동적인 관객은 할 수 없는 일 앞에서 그 일을 비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행동으로 실천한다. 영화가 도덕적 우월감에서 그치느냐 그치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관객이다.
우연한 계기에서 시작된 재심청구가 결국 재심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현실의 정의 역시 언제라도 우리들을 뚫고 나와 실현될 준비가 되어있음을 시사한다. 이 영화에 의하면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진심 어린 마음이다. 세상의 불의에 맞서던 두 남자 현우와 준영이 재심 판정을 위해 판사 앞에 선 채 영화는 끝나고, 비로소 관객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 이제 당신의 삶에서 정의를 판가름할 재심이 시작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