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독신주의자 혹은 지독한 쾌락주의자에게
스포일러: 보통
바야흐로 '포르노 사회'다. 사람들의 욕망과 욕구를 부추기는 시청각물이 각종 매체를 통해 쏟아지고 있다. TV 채널은 버라이어티 ‘먹방’ 프로그램이 장악한 지 오래고, 드라마와 영화에서조차 난데없는 먹방 연출이 등장한다. 식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맛집 없는 도시를 더 이상 찾지 않는다. 문제는 식욕뿐만이 아니다. 쏟아지는 컨텐츠 속에서 창작자들은 자극적인 포르노그라피를 생존 전략으로 삼는다. 감독은 시각에 사로잡히는 남성을 위해 노출수위를 높이고, 교감에 사로잡히는 여성을 위해 배우의 눈빛 연기를 부각한다. 영화, 드라마, 소설, 잡지, 게임, 무대 공연 등 여러 분야에서 사람들은 더 선정적이고 더 쾌락적인 요소들을 찾아 성적 욕구를 대리 만족한다. 과포화 자극 사회 속에서 인간의 감각 기관은 쉽게 피로해지고, 지쳐버린 사람들에게는 어느 순간 강렬한 수면욕이 찾아온다. 잠에서 깨어나면, 사람들은 또다시 TV를 켠다. 이렇듯 현대인들은 식욕, 성욕, 수면욕에 잠식된 채 해소감과 허탈감 사이에서 가까스로 살아간다.
인간의 욕구란 한편으로 자연스러운 본능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생존 본능과 번식 본능이 인간을 능동적이게 만든 것뿐이고, 거기에 잠식되어 살아간다한들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면 문제 될 게 없는 데다, 사회에 뛰쳐나가 극악무도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 보다야 대리만족을 통해 욕구를 해소시키는 편이 더 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가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여기 당신의 미래 혹은 당신 미래의 주변부를 다룬 영화가 있다. 스티브 맥퀸의 영화 <셰임>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줄로만 알았던 라이프스타일이 한 인물을 통해 완벽하게 부정된다.
피아노 연주자 글렌 굴드의 ‘Goldberg Variations, BWV 988: Aria’를 즐겨 듣는 브랜든은 뉴욕의 성공한 ‘여피(Yuppie, young urban professional과 hippie의 합성어)족’이다. 이들은 도시 주변을 주된 생활 기반으로 하여 지적 직업에 종사하며 개인의 취향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외모도 매력적인 데다, 번듯한 직장으로 경제적인 안정과 여유로운 일상까지 누리고 있는 브랜든의 삶은 너무나도 완벽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이면은 그렇지 않다. 브랜든이 가진 여유로움이란 이중적인 삶이 가져다 준 해소감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브랜든은 사실 추악한 섹스 중독자다.
브랜든에게 있어 섹스는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결혼은커녕 지속적인 교제 상대도 없는 그는 콜걸을 집으로 부르거나 바에서 만난 여성과 길거리에서 섹스를 함으로써 성욕을 해소한다. 샤워를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회사에서 일을 하다가도 상습적으로 마스터베이션을 일삼으며, 회사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를 포르노로 가득 채우는가 하면 알 수 없는 상대와의 사이버섹스까지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행동을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관계 후에 브랜든은 만족스러워 보인다기보다 차라리 슬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랜든은 욕망이 잠식해오는 순간에 저항할 수 없다. 그는 어느새 지하철 맞은편의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눈빛만으로 그녀를 달아오르게 만든 채, 결혼 반지를 끼고 있는 여자를 따라 브랜든은 지하철을 내린다.
관계를 맺는 몇몇 여성들을 제외하고, 브랜든의 주변은 직장 상사 데이빗과 여동생 씨씨가 전부다. 잠자리를 가지는 여성들조차 사실은 매일 같이 바뀌는 실정이다. 같은 동 주민들과 살가운 인사를 나누거나 먼저 다가가 문을 열어줄 정도로 친절한 그는 다만 수십 년 간 반복되어 온 이중생활 속에서 자발적 외톨이가 된다. 모자랄 게 없는 그에게 모든 대인 관계는 부질없을 뿐이었고, 진작에 해소된 욕구 앞에서 데이빗처럼 관계 맺음에 조급함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수 차례의 전화와 보이스메일을 매일 같이 무시하고, 외면하고픈 상황에 말을 돌리면서 최소한의 대인 관계만 유지한다. 그에게 관계란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혼자인 게 너무나도 편한 그는 외로움조차 느끼지 않는다.
미국의 혼성 그룹 칙의 'I Want Your Love'과 함께 등장하는 씨씨는 너무나도 쉽게 사랑에 빠져버리는 여자다. 최소한의 대인 관계만을 유지하는 브랜든과 정반대로 그녀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매 순간 누군가의 포옹을 원하는 씨씨는 모든 여자에게 치근거리는 브랜든의 직장 상사에게까지 너무 쉽게 마음을 뺏겨, 결혼반지도 못 본 척하며 오빠가 옆에 있는 와중에 잠자리를 가진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침부터 데이빗에게 전화를 걸어 20분의 잠자리로 끝나버린 관계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브랜든에게 수 차례의 보이스메일을 남기던 여자, 전화 통화를 하기 위해 암 말기 시한부 인생을 거짓 고백하던 여자, 그녀가 바로 씨씨다. 브랜든은 의존적인 그녀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일상의 균열을 감지한다. 브랜든은 씨씨가 관계 앞에 버림 당하고 위기의 순간에 놓일 때마다 곁을 지켜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자며, 씨씨는 욕망과 욕구에 잠식된 채 살아가던 브랜든이 도덕적인 열패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자다. 수치심의 늪에서 살아가던 브랜든은 씨씨를 통해 자신의 비정상성을 자각하고 길거리에 모든 포르노그라피들을 내다 버린다. 나아가 성적 판타지에 빠져 홀로 탐닉하던 같은 근무처의 마리안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고, 평범한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이 영화의 묘미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스티브 맥퀸은 브랜든의 삶의 단면을 통해 현대인 전반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접근을 시도한다. 영화는 시퀀스 쇼트로 일관함으로써 관객들을 인물에 몰입하게 만들고, 사운드 오버랩으로 직접 보지 못한 장면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인물의 감정은 화면의 톤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된다.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해오던 브랜든에게 관계를 진전시키는 일은 마치 이 레스토랑의 복잡한 식사 주문처럼 버겁게 느껴진다. 곧잘 끊어지는 대화와 진전 없는 데이트 속에서 모든 일들이 그를 완벽하게 뒤집어놓는 순간, 경찰이 지하철역을 통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브랜든은 무언가를 직감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구시대적이고, 자본제일주의라는 말조차 정답이 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세상은 돈만 있으면 너무나도 살기 좋은 환경으로 구축되어 있으나, 자본에 입각한 개인주의는 결국 인간을 추악하게 만들 뿐이다. 양극단을 달리고 있는 브랜든과 씨씨 사이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균형이지만, 그렇게 단정하고 넘어가기엔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도 많다. 이것은 그저 관계에 죽고 사는 두 인물에게 특화된 이야기가 아니다. 수화기가 놓인 거실과 침실을 교차하는 두 번의 카메라 워크에서 감독은 이미 당신을 브랜든의 현실로 불러들이는 데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