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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들과 바람 Jun 19. 2019

나와 만날 아이를 생각하며

   당장 생각이 있는 것도, 아직 자격이 있다고도 생각지 않지만 이따금씩 훗날 볼 나의 아이에게 전해줄 것들을 생각하곤 합니다. 아이와 축구를, 테니스를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어. 가끔 등산도 좋을 텐데 순순히 따라와 주려나. 횡단보도에서는 주의해야 한다고 말하는 건 꼭 잊지 말아야지, 등등.


   또 과연 아이는 어떤 사람일까도 상상을 해봅니다. 그의 성격도, 취향도, 능력도 작지 않은 부분이 내가 어찌 손 쓸 수 없이 마치 낯선 타자를 만난 것처럼 어느 정도 이미 형성되어 세상에 올 것이기에 몇 가지 경우들을 나누어 헤아려 볼 뿐입니다. 그중 내 아이지만 골치 아프겠어 하는 것들도 있어 도리어 나 스스로가 더욱 준비되어야겠다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상상들을 하다 보면 아이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까지 생각이 미칠 때도 있습니다. 그때 내가 바라는 것 역시 다른 사람들의 바람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아이가 안전하길, 혹 시대의 뒤틀림이나 모순이 있다면 제발 그를 비껴가기를, 그리하여 제 삶을 돌아볼 때마다 행복하다 말할 수 있길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커다란 아픔, 시련, 트라우마들을 겪은 이들이 자신 뒤에 올 이들은 내가 겪어야 했던 것들을 똑같이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간절히 비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나의 개인적인 한계들을 마주할 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그런 소망이, 나의 이런 소원이 정말 꼭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바로 그 상처들 때문에 그가 그로서, 내가 나로서 여기에 이렇게 있지 않나 잠시 질문해봅니다. 그 고통이 매우 유익했다는 좁은 뜻이 아니라 나의 나됨에 그 상처들을 분리하여 설명하고 상상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존 레논, 반 고흐 등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부모에게서 받았던 상처의 기억들이 없었다면 그들은 어떤 삶과 예술이 되었을까 그려보는 것은 애초에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세상에는 비극과 아픔으로만 비로소 보이는 삶의 진실들과 그것들로만 형성되는 자기 삶의 조각들이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가치관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건 하나도 아니지만 내가 소중히 하는 관점 중 하나는 삶 내지는 세상에 대한 양면적 시선입니다.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표면적으로 바로 인식할 수 있는 부분 이면에 (혹은 그에 뒤이어) 그와 완전히 모순되면서도 상보적인 것을 필연적으로 예비한다는 감각입니다. 앞면과 맞붙은 뒷면이 없다면 동전이 구성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때문에 나는 누군가에게 한없이 선한 사람이 되길, 즐거움만 만나는 인생이 되길, 넘치도록 풍요하길 빌어주는 것이 어색하고 조금은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다 이전에 그것이 사람과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닐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피었다 지길 반복하는 계절의 순환을, 만남이 예비하는 이별을, 고난이 선물하는 성숙을, 무의미 속에 충만할 수 있는 의미를, 삶만큼이나 값질 수 있는 죽음을 모두 아이가 온전히 마주하며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엔 분명 희망과 가능성과 빛으로 한없이 충만하게 채색되고 지탱되는 삶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삶의 모습들은 그 자체로 그 역의 삶들도 함축합니다. 훗날 만날 그 아이가 이 풍요와 상실, 희극과 비극이라는 양(兩) 풍경의 세상을 모두 승인하여 자신의 삶을 노래하고 그려내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직 그것이 참 어려운데, 욕심이려나요.



[ 이미지 출처 : 이탈리아 여행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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