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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들과 바람 Aug 28. 2019

아직 숨쉬고 있는 역사의 현존을 느끼는 것

   어릴 적부터 우리는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아직 생생히 담겨 남아있는 물건이나 장소를 찾아서 보기도 하고, 기억 속에서 우리의 나날들과 그 접점을 더듬어 찾아보기도 합니다. 그중 몇몇의 것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더더욱 잊지 말자고, 오늘로 다시 불러와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자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역사를 필사적으로 다시 요청하는 것은 우리가 사실 얼마나 망각하는 존재인지, 얼마나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시간을 마주하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절대로 잊지 말자는 외침은 얼마나 그 기억이 우리 안에서 사실 많은 시간 부재했었는 지를 반증하니요. 물론 그 망각으로 인해 사람은 위로를 얻고, 화해를 하고, 앞날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합니다. 어쩌면 잠시 뒤로 밀렸다 이내 다시 다급하게 요청되는 것이 역사의 떼어낼 수 없는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역사는 우리 의식에서만 잠시 숨었던 것일 뿐 그 자신은 한 번도 우리의 현실에서 자리를 비운 적이 없지 않았을까 새로이 생각하게 된 계기들이 있습니다. 역사에의 건망증이 부끄럽게만치 커다란 나의 삶에 그것이 자신의 현존(現存)함을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냈던 건 아마 군 복무의 경험이 아닐까 합니다. 그전까지 스스로의 생명과 자유에 대해서 불가침한 권리가 있다고 나에게 - 적어도 명목적으로라도 - 말했던 국가는 20살이 되자 2년이라는 시간을 군인으로서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개인적인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을 역사적 질곡이 낳은 그 굴레에 맡겨야만 했습니다. 역사가 아직 살아있어 이어진다는 것을 확인한 것을 넘어 그것이 나의 삶을 직접 규율하고 조정한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역사에서 특히 대부분의 무게를 차지하는 전쟁이라는 것이 오늘날까지 미치는 힘이 아닐까 합니다.


   전쟁의 기억은 다른 것들과 달리 수십 년이 지나도 결코 흐려지거나 바래지지 않습니다. 군복을 입고 택시를 탔을 때, 노년의 기사분께서는 어느새 1950년으로 돌아가 본인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묘사는 아직도 매우 생생하고 감각적으로까지 남아있는 것이어서 집 근처에서 위장하고 있었던 탱크와 하늘을 불안하게 수놓던 비행기들의 이름까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강제 징병과 겁탈을 피해 피난을 떠났던 형 누나의 뒷모습도, 불순한 존재라며 멍석에 말려 요원들에게 몽둥이로 구타당해 숨을 거둔 마을 사람들의 몸뚱아리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서 그는 창 밖에서 무슨 무슨 동맹이라는 이름의 청년 단체가 시위하는 것을 보며 혀를 차고 욕을 뱉어냈습니다. 청년들은 '동지', '미군'과 같은 단어들이 포함된 문장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습니다. "'동지' 좋아하네 썩을 놈들..." 나는 말 없이 양쪽의 사람들을, 두 개의 풍경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아직도 분명 그 생명을 가지고 우리가 사는 땅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군복과 총을 건넸고 나는 그것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택시에서 이야기를 들었던 날 밤, 노인은 꿈에서 형 누나가 피난 가던 장면을 다시 - 이미 수백 번 꾸었을지도 모르지만 -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불안과 공포와 절망의 기억은 오늘날의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일정 방향으로 틀어 놓았을 것입니다. 택시 밖 청년들이 외치던 구호들과 단어들 역시 이미 반세기도 넘는 옛날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의 흔적과 지류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새날을 찾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모든 것은 옛날까지 닿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숨쉬고 있는 역사의 현존을 느끼는 것, 사실 우리가 발 디딘 땅과 숨쉬는 공기에서까지 그것의 흔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주변의 모든 것들이 조금씩 무겁게 느껴지는 날들이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Robert Capa, <French woman and baby by a Germany sold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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