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이 있는 날

by 한우주

할 말이 있는 날 나는, 일기를 쓴다.


할 말이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날도 일기를 쓴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소중한 친구.


물론, 일기와 내가 처음부터 친구였던 건 아니다.

어린 시절 ‘일기’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칭찬받고 싶어서 썼다.


그림까지 그려서 내놓으면, 이어지는 엄마의 칭찬이 좋았고,

줄글로 쓰면서부터는 공책 끝에 쓰여있는 선생님의 코멘트가 좋았다.


‘참 잘했어요.’ 도장과 함께 있는 빨간 글씨는 나에게 뿌듯함을 주었다.


그러나

청소년기에는 일기가 숙제처럼 느껴져서,

대학생 때는 재미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쓰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툭’하고 마음이 끊어지는 것 같은 어떤 날 밤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친구가 생각났다.


그렇게 나의 일기 쓰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어릴 때처럼 칭찬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꼬박꼬박 공책을 채워갔다.

힘든 날만 쓰던 것이 어느새 매일의 루틴이 되었다.

어쩌면 매일매일이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니 내 마음 가는 대로 썼다.


할 말이 꽉 차 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을 때,

그래서 조금 외로울 때


‘아 참, 나한테는 일기가 있었지.’


라는 생각이 들면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일기는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나쁜 말을 써도 타박하지 않고,

내가 화를 내도 화내지 않는다.

나보다 더 내 마음을 잘 알아주고 안아준다.

일기를 쓰는 시간이 나에게는 곧 치유의 시간이다.


일기는 시간에 한계를 두지 않는다.

언제 어느 시간에 불러내도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필요로 하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든 만날 수 있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도 괜찮고

말을 끝맺지 않아도 이해해 준다.


밑도 끝도 없이 푸념을 시작해도 묵묵히 들어주어 나로 하여금 내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해 준다.

그날의 내 마음을 글씨체로 보여주면서 말이다.


모두 내가 쓴 글임에도 당시의 감정과 마음 상태에 따라 매번 글씨체가 다른 것이 신기했다.


일기는 내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했다가,

어느 날 나에게 조용히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지난 일기를 읽는 그 시간에서 위로받곤 한다.


‘내가 그때 이런 모습이었구나.’

‘힘들어서 그랬구나. 잘하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는 속상한 마음이 화로 표현되었구나.’


한 발 떨어져서 나를 보게 된다.

그리고 나를 이해하게 된다.


마냥 덮어놓고 있던 일기장을 우연히 집어 들게 되는 날,

펼쳐진 페이지에는 그 시절 나의 고단한 마음과

애쓴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누구보다 나를 다그치던 나에게 일기가 말해준다.

사실은 잘하고 있었다고.

조급한 마음을 좀 내려놓아도 된다고.

다 괜찮다고.


절대로 답이 없을 것 같은 상황을 토해내듯 써내려 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해결책이 반짝 떠오르기도 한다.


엉켜버린 실처럼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상황과,

너무 혼란스러워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일기장 위에서 어느새 정리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얻게 된 해결책이 딱 들어맞을 때도 있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황을 한 번 정리함으로써 그때의 복잡한 감정에서 빠져나와

상황 그 자체를 바라볼 틈이 생긴다.


나쁜 경우의 수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한다.

다시 해보자는 작은 다짐이 생기는 것은 일기의 선물이기도 하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단 한마디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펜을 들고나니 끝없이 이어지는 글자들과 마주하게 되었던 날,


한참을 울었다.

글씨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그치고 나니 마음도 조금 가벼워졌다.


덕분에,

마음이 무거운 것은 눈물의 무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일기에게 받은 또 하나의 선물이다.


일기에는 나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고백한 글에서 용기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도 그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한 사건 속에서는

그전까지 맘 졸이며 애쓴 내 모습이 새삼 보이기도 한다.


지난 기록을 읽으며 잊고 있던 한 시절을 떠올리고 새로워하기도 한다.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잊지 말아야 할 일을 되뇌며 마음이 단단해지기도 한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글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었다.

일기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내 안에 가득한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아 마음이 무거워질 때

그래서 몸도 같이 무거워질 때

나는 어김없이 일기를 찾는다.


내 친구는

언제나처럼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듣는다.

내 눈물을 받아준다.

내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지금, 이 순간도 다 지나갈 거라고 말해준다.

열심히 살았던 만큼 힘든 거라고 힘든 건 잘못이 아니라고 알려준다.

계속해도 된다고 틀리지 않았다고 가르쳐준다.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만나자고 약속해 준다.


일기에게 배운 나는,

누군가에게 나도 일기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


할 말이 있는 날, 나는 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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