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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K Oct 11. 2021

“건축에 잠재한 가상, 가상에 잠재한 건축” 중에서

공간지 8월호에 기고한 글의 일부



공간지에 글을 기고하였습니다.

원문의 일부를 브런치에 첨부합니다.






가상이 공간이 되었다. 최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가상 요소들을 인간을 둘러싸는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공간에 관계된  가지 테크놀로지는 충분히 사실(real)적이라 현실(reality)이라는 단어로 불린다. 여기에는 구축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상 환경에서의 건축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에 관한 가장 쉽고 일반적인 생각을 꼽으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것이다. 가상이 현실이 되면, 가상 환경에서도 기존 현실에서처럼 건축을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건축을 한다는 것은 무엇이었나? 아이러니하게도 건축은 오래전부터 가상의 결과물을 다루던 분야였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건축가의 역할을 건물을 짓는 일과 구분하여 건축물의 표상(representation) 다루는 일로 분리-정의한  있다. 여기서 표상이란 무엇인가? 표상은 매체를 통해 대상을 모방 또는 재현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건축 드로잉짓고자 하는 건물을 종이 위에 재현하는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알베르티의 생각은 오늘날 건축가라는 직군과 건축이라는 분야의 성립을 가능하게  핵심 전제가 되었다. 건물을 직접 짓지 않게  건축가는 짓고자 하는 대상을 종이 또는 스크린 등의 매체(medium) 투영(projection)하는 일을 한다. 당연하게도, 매체에 투영된 상태의 건축은 가상의 속성을 갖는다. 이는 건축 행위의 근간에 가상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지어진 건축물 또한 오랫동안 가상과 결부되어온 역사가 있다. 건축 역사를 돌이켜보면, 많은 건축물들이 현실 너머의 개념들을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과 감각으로 번안하려고 노력해왔다. 종교적 건축물이 대표적이다. 서구 건축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해온 성당 건축은 그 목적이 현세의 리얼리티에서 천상계 혹은 사후세계라는 가상의 리얼리티를 표현하거나 방문자에게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당 건축물에는 두 종류의 다른 리얼리티를 하나의 공간에 혼재하려고 했던 다양하고 구체적인 시도들로 가득 차 있다. 가상에 대한 완벽한 몰입을 추구하거나 실제와 가상을 혼재하려는 충동은 건축의 오래된 욕망이었다. 이것이 발전해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건축의 역사를 이룬다.


성당 건축물의 천장 프레스코(천장화) 이에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다. 프레스코는 건축물의 비어 있는 면에 종교적인 교리를 그림으로 기록하는 것에서 출발하였지만, 이것은 점점 내부 공간의 요소와 뒤섞여 내부 공간이 가상의 세계로 확장되어가는 효과를 갖게끔 발전해간다. 바로크 시대의 천장화를 올려다보면 실제 기둥이 끝나고 지붕이 있어야  자리에, 완벽한 투시도법과 명암 기법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그려진 가상의 기둥이 건물에서 연장되어 천상으로 뻗어나간다. 그리고  위에는 신과 제자들이 노니는 하늘이 자리한다. 이것은 위를 올려다보는 방문자로 하여금 거의 완벽한 몰입을 가능하게 한다. 심지어 여기에     프레스코는 건물의 입체적 장식 요소와 회화의 평면적 요소들을 마구 뒤섞어 어디서부터 진짜이고 어디서부터 가상인지의 구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VR AR이라고 부르는 것의 오래된 버전이 아닐까. 이것이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로는 바로크 건축양식의 서막을  것으로 유명한 로마의  제수 성당(Church of Il Gesù) 천장 프레스코가 있다 “




(중략)




이렇게 되면 현실보다 강력한 것은 경험이 되고, 현실성에 대한 결정권은 경험의 주체로 이동한다. 이것은 실제 공간과 가상 공간 모두, 최종적인 형성과 존재 방식이 주체 내부의 자의성에 기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있다. 바꿔 말하면, 실제든 가상이든 모두 주체에 의해 현실이   있다. 그렇다면 가상은 실제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건축계에 친숙한 철학자  들뢰즈의 아이디어는 여기에 힌트를 준다. 그에 의하면 ‘가상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의 단계이며, 내재하는 차이를 구현하는 것을 뜻한다. 오역으로 점철되어 건축가로 하여금 정말로 주름진 형태를 만들게 했던 그의 유명한 아이디어 ‘주름 바로 ‘가상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은유이다.  철학적으로 가상은  자체로 자기만의 현실성을 품고 있지만 단지 실제화(actualized)되지 않은 채로 잠재한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상 테크놀로지 이름 앞에 붙은  ‘가상 동일한 의미를 지닐까? 사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가상 환경 또는 공간은 VR 혹은 AR 등의 일부 테크놀로지가 가져다주는 특정한 영역의 새로운 세계이다. 이것은 가상이라는 넓은 의미 영역의 일부일 수도 있고, 어쩌면 가상이 아닐 수도 있다. 이는 오래된 논쟁거리이다. 1980년대에 VR 태동할 무렵 사람들은 다양한 이름을 놓고 이것을 어떻게 부를지 고민했다.  후보군에는 ‘가상 현실뿐만 아니라 ‘가상 환경’, ‘합성 현실’, ’인공 현장감’, ‘인공 현실등이 함께 있었다.  여기에는 크게  가지 축의 고민 거리가 있다.  번째는 이것이 단순히 인공인가 혹은  이상의 가상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번째는 이것이 단순한 현장감인가, 환경인가 아니면  이상인 현실인가에 관한 것이다.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당대 사람들은  테크놀로지에 관하여 가장 커다란 의미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기술을 바탕으로 환경이라는 개념을 넘어선 새로운 세상(메타버스 ) 상상하고 구현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테크놀로지가 선사하는 결과물이 사람들에게 ‘공간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VR 사용자를 끊임없는 내부에 위치시킨다. VR 이용해 가상 환경을 만드는 사람은 사용자를 둘러싸는 전체를 완결지어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는다. 이것은 그동안 건축에서 다뤄온 공간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지금까지 건축에서의 공간은 주된 결과물이 아니었으며, 형태를 만들다보면 도출되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달리 말하여, 건축에서의 공간은 건축물로써 완결되었지, 끊임없는 공간의 연속으로 완결되어진 적이 없다. 게다가 재료도 다르다. 가상 공간을 채우는 것은 모두 이미지이다. 인간이 공간을 경험하는 일은 이미지를 흡수하고 재구성하는 일로 치환된다…”




(중략)




이름은 대상의 가능성을 결정한다. VR 그랬던 것처럼 건축이라는 이름도 그러하다. 가상 공간에서 건축가는 무엇을   있을까 혹은 건축은 어떠한 새로운 단계를 맞이할  있을까 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건축이라는 이름 뒤에 담아내는 상상력의 크기에 달려 있다. 이것은  다른 지점에서도 중요하다. 건축가는 VR이나 AR 같은 테크놀로지를 직접 개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상수이지 변수가 아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바탕이 기본값이라면 무엇보다 건축의 유연한 포용과 대처가 중요해질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가장 안타까운 상황은 등장하는 테크놀로지를 관습적인 설계 과정을 보좌하는 시뮬레이션 도구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활용은 19세기 후반 시네마가 등장했을 , 그저 무대 연극을 녹화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던 단계와 다를  없다. 시네마가 몽타주나 움직이는 카메라 등의 고유한 가능성을 발견하여 시네마만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듯, 가상과 관련한 테크놀로지 또한 자신만의 특정성을 통해 전례 없던 영역으로 도약할  있지 않을까. 여기서 건축이 무엇이고 무엇이었는지는 아무 상관 없다. 우리는 새로운 영역에 던져졌다.”






아래는 원문의 전체를 읽어볼 수 있는 링크*

https://vmspace.com/report/report_view.html?base_seq=MTU4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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