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WK Apr 06. 2020

코로나 이후의 건축

건축 문화에 대한 가벼운 단상



코로나 사태 이후에 세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것은 요즘 모든 사람이 각자의 분야에서 갖는 초미의 관심사이겠다. 따라서 건축에 대해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코로나 이후에 전염병 대비가 ‘디폴트’가 된 사회에서 건축은 어떠한 변화를 겪을까? 그리고 이와 관련한 기사들도 종종 올라온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그러하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아줄 스마트 도시 디자인’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건 없다. 있다고 해도 말이 안된다. 무엇보다, 코로나 이후에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건물이 당면해왔던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낮은 시공 품질과 낙후된 설계 프로세스 및 시스템,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친 ‘건축 디자인에 대한 피상적인 관념’ 등은 코로나가 오든 안 오든 간에 개선되어야 할 문제들이었다. 숙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나저나, 저런 기사(속의 프로젝트 이미지)는 도대체 왜 뜨는 것일까? 해당 기사는 자극적인 타이틀을 걸어놓고 이와는 상관없는 다른 종류의 자극적인 이미지들을 전시한다. 이 이미지들은 마치 유려한 미래 도시 풍경 속에 거주하면, 작금의 자질구레한 바이러스 같은 것들은 극복되고 일상이 ‘스마트’해질 것처럼 속삭인다. 물론 여기에 속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하 하디드의 곡선 디자인과 전염병 확산 방지 혹은 스마트 도시는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기사 속의 다른 예시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아무 상관이 없다.


이는 너무 상식적인 부분이다. 건축이 좀 더 신기하게 생긴다고 해서 전염병 확산이 더 잘 제어될 리는 만무하다. 왜냐하면 바이러스 통제는 프로그램적인 부분이지 하드웨어(특히 모양)의 디자인과는 하등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건물의 모든 공간이 음압 기능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건물의 모양이 극단적으로 바뀌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스마트 도시도 마찬가지다. 스마트 도시라고 하여 도시가 유려하게 생길 필요는 전혀 없다. 지금과 같은 도시 형상에서도, 소프트웨어의 개선을 통하여 스마트한 라이프 스타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베니스 혹은 파리처럼 구 시가지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한 도시들도 오늘날 인터넷을 잘만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관성은 사실 건축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부분이다. 건축에는 형태를 가지고 거짓말을 해온 유구한 전통이 있다. ‘형태를 통한 환상’을 주입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건축 본연의 임무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기분 전환' 혹은 '다른 느낌'이라는 효과를 제공했다.) 교회 건축을 예로 들어보자. 건축가는 빈 땅에 ‘신이 거주할 것만 같은’ 형상의 구조물을 지어, 그 공간에서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 ‘신이 곁에 있을 것 같은’ 환상(분위기 뿐만 아니라 공간의 구축 및 배치 논리까지 모두 포함한 환상)을 갖게 만들어야 했다. 건축은 그동안 인간이 가진 ‘물질적 형상과 추상적 관념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비논리적 본능’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픽션을 구성해왔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 다시 근대를 넘어 현대로 시간은 이동했지만 이러한 관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예시는 멀지 않다. 건물이 낮으면 정말 땅에 순응하고, 수직적 권력 구조가 조금이라도 와해될까? 건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형상을 띠면 부처 간의 협력이 증가할까? 건물이 수직으로 올라서면 어떤 (수평적인) 정신을 해치게 될까? 이것은 일전의 세종시 이야기다. 어쩌면 심사위원장 자리를 걸고서 타워형을 반대해야 했던 한 건축가의 무의식에도 형태에 대한 토테미즘적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광화문 광장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축을 복원하면 정말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금 다른 사례도 있다. 패시브 하우스는 왜 다 못생겼을까? 시공 품질과 구조적 성능에 집중한다고 홍보하는 건물들은 왜 다 똑같이 둔하게 생겼을까? 전원생활에 충실하고 싶다는 흙집들은 왜 저렇게 생겼을까? 여기에는 한편으로 ‘멋진’ 건물이 어쩌면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본질을 왜곡하거나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편견과 두려움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보면, 패시브 하우스를 못생기게 내버려 두는 설계자의 논리는, 낯선 형상의 DDP를 극도로 거부하며 해당 대지에 익숙한 건물을 올려놓고 싶어 했던 기성 건축가들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건물-도시의 기능과 이것의 외모(이미지 혹은 인상)는 별개다. 그러나 건축은 사소한 일상에서 까지,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을 떠나서 이미지에 대한 쟁탈전을 계속 벌여왔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굵직한 역사적 무브먼트들도 스케일만 다르지 픽션의 구조는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에 진리는 없으며, 다만 진리를 가장한 허구로 이미지 헤게모니를 쟁탈하려는 욕심꾸러기들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정적인 단면이 아니라, 건축 문화의 자연스러운 속성이며 창작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건축이 ‘한편으로는 밑도 끝도 없이 정치적인’ 독특한 문화적 장르라는 사실이다. 


(일례로, 노트르담이 화재로 무너진 뒤 복원안으로 쏟아진 터무니없는 드로잉들에서 우리는 건축 문화의 본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따라서 코로나 이후로, 사회적 거리두기와 각종 원격-행위들이 일상화되는 틈을 타서 건축은 온갖 요상한 제안들을 들이밀 것이다. 그리고 그 제안들은 당연히 자극적인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건축이 그동안 자연스럽게 해오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그저 즐기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코로나를 통해 우리가 실질적으로 맞이한 현실 문제 해결과는 사실 별 상관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로나 전부터 있어온 건물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건축 행위’와 ‘좋은 건물을 공급하는 행위’는 별개이기 때문이다. 


좋은 건물과 공간을 디자인하고 지음으로써 이를 우리 사회에 공급하는 행위에는 코로나 등의 사회적 이슈와 아무 상관없이 이미 주어진 문제가 산더미다. 건축은 여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건물-이미지에서의 헤게모니를 쟁탈하려 하는 건축가는 있을 수 있다. 일례로, 산업화와 급격한 경제성장에 대응하여 빈자의 미학을 주창하고 특정 스타일을 밀어붙인 한 건축가의 사례가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건축 본연의 모습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혹되지 않으면서 이러한 건축가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 아닐까. 






표지 이미지: 구글 이미지 검색 zaha hadid smart city




매거진의 이전글 타다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