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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훌리 Sep 28. 2020

쉽게 휘는 사람이라 미안해

종례시간 읽어주는 담임의 편지

 오늘은 몇몇 친구들에게 내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자 읽는 편지야. 선생님이 더 원칙과 원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면 너희들과 얼굴 붉히면서라도 휴대폰을 걷었을 텐데. 너희의 함박 미소 한 방이면 그냥 무장 해제돼서 나눠주게 되네. 그렇게 교실을 나올 때면 늘 내 손에 들린 몇몇 휴대폰의 주인들에게 미안해져. 이 마저도 주고 나올까 싶다가 '아니야 열심히 규칙을 지킨 친구들에겐 무언가 보상이 있을 거야' 하며 교무실로 향해. 그런데 그 미안함은 퇴근해서도 계속 이어져. 침대에 누워 하루를 되돌아보면 단호하지 못한 내 모습이 왜 이리 싫은지 미간이 펴질 새가 없어.


얘들아. 쉽게 흔들리는 선생님이라 미안해.


하지만 이건 약속할 수 있어. 그게 언제가 되었든 규칙을 지키고 존중하는 너희의 자세는 인생에서 큰 선물로 돌려받게 될 거야.



가끔 선생님 말 안 듣고 도망가는 너희를 보며 생각해. '저것도 삶의 작은 재미고 일탈이겠지.' 이렇게 이해해줘야 할 일들이 쌓이면 선생님도 조금은 지쳐. 너희가 선생님 말을 잘 들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실도 지금보다 더 깨끗하고 수업 분위기도 더 좋아질 텐데. 그럼 선생님 걱정이 그만큼 줄어들 텐데. 이건 쉽게 휘는 나라서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인가 싶어.


학교에 가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의 답은 나오지 않고 그냥 너희에게 미안하고 고마워. 이건 꼭 얘기하고 싶어 쉽게 흔들리는 선생님이지만 교칙 앞에서는 단호한 선생님을 만나게 될 거야. 그땐 무조건 너희의 편만 들어줄 수는 없어. 알겠지? 100일도 남지 않은 한 해 우리 아슬아슬하지만 큰 일 없이 마무리해보자!



너희를 만나러 갈 생각에 너무 설레는 선생님이야. 이건 거짓 아니라 참 트루. 고마워. 오늘도 수고 많았어. 안녕.


2020.09.28. 대나무가 되고 싶은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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