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정한 인생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기
어제 전 직장 동기를 만났다.
그는 6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으로 떠난단다.
아내가 이미 그곳 국제기구에서 근무 중이라, 함께 살기 위해 유럽으로 간다.
그건 단순한 ‘따라감’이 아니었다.
그는 오래 품어온 꿈, ‘교수의 길’을 향해 해외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른넷. 결혼도 했고, 회사에서도 인정받던 친구다.
얘기를 들을수록, 부럽다는 마음보다 '대단하다'는 감탄이 커졌다.
그는 요즘 작별인사를 많이 받는다고 했다.
한 선배는 36살에 회사를 그만둔 뒤, 미혼인 상태로 로스쿨에 진학해
지금은 다시 회사로 돌아와 영업팀장이 됐다며
그의 퇴사와 새 시작을 격려했단다.
또 다른 선배는 “나도 그때 유학 가고 싶었지만 못 갔다”며,
“지금이라도 꼭 가라”고 등을 밀어줬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이 동했다.
남의 인생을 응원하는 말들 사이에서, 나는 내 인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누군가의 시간표 위에 서 있다.
몇 살에 취업, 몇 살에 결혼, 몇 살에 아이.
그게 마치 사회가 정한 법이라도 되는 듯, 다들 그 틀 안에서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그 ‘안정’이라는 건, 남이 그어놓은 선 위에서만 가능한 평화 같다.
조금만 벗어나면 불안해지고, 그 불안을 두려워해 다시 선 안으로 돌아온다.
그 친구는 그 불안을 안고도 움직이고 있다.
아내와 함께할 새로운 나라로 가면서, 동시에 자신의 꿈을 다시 붙잡았다.
그건 타협이 아니라 동시에 두 가지를 선택한 용기였다.
‘누군가를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같이 가되 나로 사는 삶’처럼 보였다.
같이 가되, 나로 사는 삶
그게 진짜 용기 아닐까
결국 인생의 방향키는 내가 쥐고 있어야 한다.
남이 정한 좌표에 도착해 봤자, 거기엔 박수도 보장도 없다.
나중에 되돌아봤을 때, 내가 산 건 ‘한국 사회 평균의 인생’인지,
아니면 진짜 ‘내 인생’이었는지 — 그 차이는 결국 방향키가 누구 손에 있었느냐로 갈릴 것이다.
그의 용기가 내게 번졌다.
사회의 시계가 아닌, 내 속도계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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