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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Sep 19. 2016

신에 대하여

경주에 강도 5.8 지진 났을 때 내 앞에 있던 테이블도 크게 흔들렸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 정도 지진으로 내가 위험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확신해서이다. 분명 예전 나 같았으면 너무 무서워서 안절부절 못했을 것인데, 이번 지진으로 내가 공황이 확실히 없어졌단 사실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나의 이런 변화에는 신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종교가 한번도 없었던 내가 신에 대해 말하기가 매우 조심스럽지만, 누군가에게는 나의 신에 대한 견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적어본다.      


공황장애로 (생물학적으로는) 절대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 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아무리 내가 심장이 빨리 뛰어도, 경악할 만한 어떤 것이 내 앞에서 도저히 사라지지 않아도, 두려움에 한 순간도 버틸 수 없을 지경이라도, 아들레날린이 미쳐 날뛰어도 10~20분이 후엔 결국 내 몸은 안정적인 부교감신경이 지배하게 된다. 내가 공황으로 죽고 싶어도 나는 죽을 수가 없다. 의사선생님께서 그 사실을 과학적으로 알려주셨다.      


우리 몸은 어떻게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까? 인체는 정말 신비로웠다. 나는 이 하나의 사실에서부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느낌을 받았고, 신의 존재를 처음 느끼게 되었다. 신은 나에게 극단적인 고통은 주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죽기 직전에는 항상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든 살려주신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고통이 와도 덜 힘들 것이고, 그 사실을 모르면 이 세상이 너무 삭막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는 이제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기에 종국에는 모든 상황이 항상 괜찮을 거라고 믿는다.           



신은 신의 역할이 있고 인간은 인간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우리의 역할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서 신의 역할에 대해서 주제넘게 간섭하고 걱정하기에 공황이 찾아오는 것이다. 신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존재 자체가 아니다. 그 분은 그 분의 뜻이 다 있는 것인데 우리가 주제넘게 나서서 신에게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하는 것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아르바이트 하러 가기 전날 밤에 잠이 안 와서 고생한 적이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데 출근해서 피곤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일을 하는 거라서 몸이 피곤하면 사고 날 수도 있는데 어쩌지? 빨리 잠이 와야 하는데 왜 잠이 안 오는 거야?’ 이렇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걱정한다고 내가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따뜻한 우유라도 한 잔 마시고, 내 몸을 편안히 눕히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잠이 오고 안 오고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더 이상 뭐 어떻게 하겠는가? 신은 전지전능하고 모든 일을 결정한다. 신이 나를 몇 시에 잠이 들게 할지는 모르지만, 난 그저 신을 믿고 편안한 마음으로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늦게 잠이 든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예전에도 밤에 잠을 못자고 출근한 적이 있었다. 힘들긴 했지만 견딜 만 했다. 그러다가 진짜 내가 몸이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았을 때는 참 희한하게도 배달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만 계속 들어와서 쓰러지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신은 내게 극단적인 고통은 주지 않았다. 나는 이런 현상을 볼 때마다 신의 꼬리가 길어서 내가 신의 존재를 눈치 채는 것 같다. 내 삶의 한 단면 단면 마다 신의 존재를 느낀다.      


다음 달에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정엽의 ‘nothing better’ 노래를 혼자서 불러야 한다. 이런 경험이 많지 않아서 떨리지만 큰 걱정은 안 한다. 예전 같았으면 ‘노래 하다가 너무 떨려서 실수를 하면 어쩌지? 사람들이 지루해하면 어쩌지?’ 이런 걱정을 많이 했겠지만 이제 그런 걱정한다는 것 자체가 나의 오지랖이라는 것을 안다. 그날 노래가 잘 되고 안 되고도 역시 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나는 그저 가사를 열심히 외우고 그 가사의 감정을 느껴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신이 알아서 잘 되게 해주시겠지. 뭐. 그리고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야지 그날 내가 가장 좋은 컨디션으로 노래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내가 결과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의심이자, 결례이다.      


예전에는 당연시 했던 걱정을 요즘은 하지 않는다. 그 동안 내가 혼자서 짊어지었던 그 부담스럽고 무거운 짐들을 신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내 인생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신과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인간관계를 함에 있어서도 나는 신을 요청한다. 어떤 모임에 가서 사람들에게 내 의견을 말을 해도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듣는 경우가 많다. (내 기준이겠지만) 분명히 내 말은 옳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경우에도 방향이 어긋나버린 상황에 대해서 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무리하게 그 방향을 바로 잡으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 내가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내 의견을 충분히 제시했으면 그걸로 내 역할은 끝이다. 스트레스도 없다. 주제넘게 그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설령 잘못된 결과가 내게 오더라도 그것은 신이 결정한 것이고 신의 결정은 항상 옳은 것이다.      


다만 우리가 신 앞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신의 뜻을 최대한 맞혀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많은 시련도 다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은 실수를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빅터프랭클은 ‘시련은 그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라고 하였다. 내가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공무원 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고, 노래를 망칠 수도 있고,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뜻이 있다. 그 뜻을 알면 우리는 그 일로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 안 좋은 결과라도 그것은 신의 뜻이고 이 드라마가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속단하면 안 된다. 신을 믿고 최대한 신의 의도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퍼즐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시련의 의미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공황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지금은 삶의 매 순간에서 신을 요청하고, 신의 힘에 의지하며, 신을 느끼며, 신과 함께 하고 있다. 신은 이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생명을 주었고, 아름다운 자연을 주었고, 행복을 주었고, 사랑하는 이를 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그러므로 신이 나를 죽이든 살리든 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하고 불안 없이 나를 온전히 맡길 것이다. 이미 감사하므로 바라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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