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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Sep 21. 2016

삶의 긍정적 패턴

A는 5.8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 직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야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진이 일어났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 뒤 4.5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집에 있었는데 무서워서 잠을 잘 못 잤다.


불안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아무 영향도 없다. 다만 우리가 불안이 필요할 때는 그 순간 순간 마다 불안을 간편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글래서는 이것을 ‘선택이론’이라고 하였다.) A는 왜 직장에 있을 때는 지진이 무섭지 않았을까? 그것은 A가 직장에 있을 때는 바쁜 일을 하고 있었고, 그 일을 잘 해야 승진이 되었기 때문이다. 승진이 되어야 다음 달 월급도 오른다. 그런 지극히 현실적인 일들이 A에겐 지진의 공포보다 더 중요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지진의 공포와 일할 때의 집중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무의식은 하나의 감정을 빠르게 버리고 나머지 하나를 택한 것이다.


B라는 사람은 5.8의 지진이 일어났을 때 여자 친구와과 첫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도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데이트 순간의 설렘을 항상 기대해왔었고, 오래 준비해온 그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지진의 불안을 굳이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뭔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A는 왜 4.5의 더 약한 지진에서는 불안해했을까? 그는 그때 집에 혼자 있었고 이런 저런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다.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는 요즘 하는 일들이 잘 안 되어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뭔가 불안하긴 한데 뚜렷이 원인은 모르겠고, 보이지도 않는 감정들을 소화하기가 버거웠는데 갑자기 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공포보다 보이는 공포를 더 선호한다. 그래서 자신의 애매한 불안들을 지진의 공포에 다 투사하여 그 지진이 더 무섭게 느껴진 것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불안을 선택하는가?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선택할 수 있다면 많고 많은 좋은 감정을 놔두고 왜 이렇게 불안, 공포를 선택해서 고생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불안이 있어야 우리가 우리를 더 잘 통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지진이 일어났는데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지진이 크게 일어났을 때 가만히 있어서 다칠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긴장은 필요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모든 일에서 걱정을 과하게 함으로써 그 상황에 잘 대처하고 있는 것이라 믿고 있다.


심리학자 아들러가 말한 목적론의 핵심은 공포나 불안, 사랑과 같은 모든 감정들은 어떤 목적이 없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감정들에 집착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만약 한 남성이 어떤 여성을 결혼이나 사귐을 목적으로 대한다면 사랑이란 감정이 쉽게 생길 수 있다. 나중엔 그 감정이 감당 못 할 만큼 커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여자가 배신을 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면 처음의 목적은 사라지고 그 감정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그때는 그 여자와 멀리해야할 사회적 필요(새로운 목적)가 생기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그에게 그녀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자리 잡는다. 불안이나 공포도 쉽게 사라지는 것들이다.



이 세상에는 걱정하는 마음보다 긍정적인 정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한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순간을 걱정하기보다 자신이 해야 할 많은 일들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다. 이 세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 세상을 선물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항상 긍정적인 목표가 있기 때문에 걱정 자체를 많이 안 한다. 그런 사람들은 걱정이란 것은 실제로는 우리에게 별 도움이 안 되며 오히려 삶에 대한 기대가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고 여긴다. 지진이 일어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말이다. 삶의 방향을 잃고 의무가 있어야만 사는 사람들은 지진이 일어나면 크게 반응한다. 그때 딱히 재미있게 할 것도 없고 심심해서 그냥 불안해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 선택은 일정한 패턴을 이룬다. 성장과 도전이 귀찮아서 자신의 과제를 피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택하느냐, 긍정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이 세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인 사람이 되느냐를 우리는 선택을 해야한다.


심리학자 아들러의 이론도 이런 삶의 패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아들러는 열등감에 유난히 힘들어 하는 사람들의 패턴을 자주 한다. 그런 사람들은 열등감이 있어야 매사에 신중할 수 있으며,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지루하거나 귀찮을 때도 우리는 열등감을 자주 가진다. 그래야 하기 싫은 일을 최대한 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열등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직업은 마술사인데 자기 일에 아이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항상 새로운 도전을 계속 하고 싶어 한다. 열등감과 일의 즐거움도 공존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이 만약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 속에서 열등감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면 열등감이 전혀 없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스포츠를 하더라도 플레이 하는 것 자체가 재미가 있고, 자신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면 자기가 꼴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운동에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본질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을 즐길 줄도 모른다. 무엇을 하든 남들보다 잘하는 것만 우선으로 한다.


이 세상의 자원은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풍부하다. 스포츠도 재미있고 노래하는 것도, 글 쓰는 것도 그것자체로 다 즐거운 일이고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혹은 의무감에 이런 것들을 해서는 안 된다. 그 본질을 느끼지 못하고 자꾸 주위를 의식하니깐 열등감이 생기는 것이다.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 모든 것에 긍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몰입해야 한다.


나는 발표하기를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남들 앞에 서는 것이 떨리지 않느냐고 묻는다. 물론 떨리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마음에 담아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들 앞에서 말을 잘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는 것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발표를 한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다수에게 내가 가진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 아닌가? 굳이 남들에게 잘 보이거나 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발표를 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 더 크다면 무대 위에서 가지는 불안이나, 쪽팔림, 열등감 이런 감정들에 내가 관심이 가지도 않고, 그런 감정들로 힘들 일도 없다.



우리는 삶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진이 일어나도 불안함만 수집할 뿐, 왜 좋은 감정을 다 무시한다. 하지만 우리 삶의 혁명은 평소에 방치된 긍정적인 감정을 수집하는데서 시작한다. 감사일기를 매일 꾸준히 쓰는 사람들은 왜 자기가 좋은 감정을 가져야하는지 그 필요성을 정확히 알고 있다. 내가 삶에 감사하니깐 나에게 더 좋은 일이 생기고 삶의 질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이 세상을 선물로 인식하고 긍정적인 기대를 해야 실제로 내가 승진도 빨리하고, 결혼도 빨리하고, 월급도 많이 오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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