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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Jun 07. 2017

좋은 느낌에 집중하기_ 감사일기를 왜 써야할까?

(나를 위한 글, 노잼) 



5일을 쉬는데도 하루를 안 놀고 있었다. 밖엔 햇살이 밝은데 말이다. 빨리 성공해야 된다는 압박이 심했던 것 같다. 할 일이 많다. 이 무게감 때문에 영 기분이 안 좋았다. 행복이 안 느껴졌다. 이 상황에서 여자들과 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연을 보고 산책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ㅇㅇ와 놀았다. 용지호수를 걸었다.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결국 놀았다.


남친과 결혼을 간절히 바라는 여자가 있다. 남자는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 그 여자가 윌리엄글래서(심리학자)를 찾아왔다. 그는 이렇게 조언했다. “미래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당신의 현재를 망치고 있어요. 그와 전보다도 더 잘 지내는데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그는 당신이 자기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요. 계속해서 그걸 알려주려고 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는 나하고-결혼-해줘요. 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일을 중지했다. 그들은 3개월 동안 너무나 잘 지냈다. 그녀는 그와 잘 지내는 데만 신경을 기울이고 어떤 일도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행복하게 결혼하였다. (‘행복의 심리’ 내용 중)


현재에 산다는 것. 그것이 주는 힘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예전에 공황 때문에 모든 것을 ALL-STOP 하고 살았다. 지금 이렇게 억지로 쪼아봐야 조급함만 더 커지고 일은 더 안 되었다. 현재에 집중하는 과정이 미래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물리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항상 감사한다는 것은 현재의 좋은 느낌에 계속해서 집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은 창원도서관에 계속 있었다

 



자세히 보면 우리는 나쁜 느낌에 계속 집중을 하고 있다. 전쟁이라던가, 가능성도 희박한 나쁜 일(을 굳이 찾아가면서까지)에 매달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말이다. 쪼개서 보면 분명히 그렇다. 안 좋은 생각에 얼마나 집중을 하는지 발견하면 정말 놀란다.


우리는 미래를 걱정하고, 자신을 협박함으로써 모든 일을 통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큰 힘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좋은 느낌을 좋아하고 안 좋은 느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할 일을 강요하면 당장은 억지로 몸을 움직이지만 결국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 최근 나태했고 늦잠을 자주 잤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무의식의 태업이다. 엄청난 손해다.


만약 우리가 미래에 대한 모든 걱정을 그만하고, 좋은 느낌에만 집중한다면 아침에도 수월하게 일어나지 않을까?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행동도 더 민첩해지지 않을까? 위에 커플들처럼 현재에만 집중을 하고, 사랑을 느끼는 데 집중을 한다면 미래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중 3 마지막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 기억난다. “원식이 이제 마지막이네” 그 말이 전부였다. 그분은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다. 그땐 ‘마지막’이 뭔지 잘 몰랐다. 이 순간이 지나면 영원히 못 본다는 것이 어떤 건지. 만약 그때 내가 그 의미를 알았더라면, 선생님께 좀 더 다정하게 작별인사를 건네지 않았을까? 마지막이 언제인줄 안다면 우리는 현재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오늘 마주친 것들 중에도 마지막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도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비오는 날의 냄새, 밤의 가로등 거리, 시원한 바람. 이런 일상 속에서도 말로 표현 못할 좋은 느낌을 느낄 수 있다. 그 순간에만 집중한다면 말이다. 공황이 왔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배경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현재를 더 느낄 수 있었다. 이 순간이 마지막, 혹은 전부라는 느낌. 사람들은 그 느낌을 절대 모른다. 우리가 원래 알던 행복이랑 차원이 다르다. 시간이 느리게 가고 오감이 더 분명해지는 경험, 그건 초감각이다. (긍정적 의미에서) 마약보다 훨씬 더 좋은 느낌일 것이다.


우리는 왜 현재에 집중하지 않는 것일까? 진화생물학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 정도까지의 행복은 우리가 강한 종족이 되는 데 필요 없는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맛있는 거 먹어서 행복하고, 섹스를 해서, 성공해서 행복하면 됐지, 굳이 현재에 집중까지 해가면서 그런 초감각을 느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행복감이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를 퍼트리는데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시간을 투자해가면서까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ex, 감사일기를 쓰거나, 명상을 하는 등의 노력) 분명히 우리의 진화생물학적 경쟁력과도 상관이 있다고 본다. 다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 연결고리를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무의식적으로도) 현재에 집중하거나 삶에 감사하는데 시간을 쏟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초감각적인 행복을 원한다면 수단과 목적이 바뀐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결혼보다는 현재의 사랑이, 시험 1등보다는 노트에 예쁘게 필기하는 과정이, 성공보다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해질 것이다. 현재에 집중할 때 미래는 더 빛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초감각을 무시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 마약보다 진한 맛을 알고, 거기에 맛들어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노력’이란 것을 하게 된다면, 오로지 그 느낌만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just do it’이 되는 것이다. 결과가 주는 행복대신 과정이 주는 행복을 추구하면서 ‘오직할뿐’의 자세로 임하다 보면 우리는 무엇을 하더라도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더 추상적으로 얘기하자면) 어쩌면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고, 딱 이 정도의 이기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도, 그 초감각적인 행복의 느낌을 몰라서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카르마가 변하지 않는 것도 그 집중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법륜스님도 팔자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감사일기를 쓰라고 하는 것 같다. 세상은 2분법적이다. 결과가 주는 행복을 쫒으면서 사는 것과, 관찰자적 시점에서 과정을 음미하고 사는 것. 우리는 두 번째 방식에 익숙해져야한다. 그렇게 해야 모든 일이 잘 된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현재는 만져지지도 않는) 초감각적인 행복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새로운 시도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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