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뭔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종교였다. 어쩌면 내가 한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종교가 나를 구원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살면서 정말 신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교회를 찾게 되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진짜로 신이 존재한다고 믿으려 노력했다. 사실 정말 믿고 싶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 곳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보니 점점 그들이 말하는 믿음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원래 그렇게 합리적인 아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사님께서 하는 이야기 모두 의심이 들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창조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이미 갈라파고스에서 찰스 다윈이 본 내용을 알고 있었다.
모세가 어떻게 바다를 가를 수 있었을까? 노아가 만든 배 하나에 그 많은 종들을 다 실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목사님은 홍수가 날 당시 노아의 나이가 600세라고 했다. 뭐 그게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를 믿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하지만 안 믿기는 것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만약 교회에서 내가 좀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더라면 나는 정말 신을 믿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유도 그 믿음이 쉽게 생기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 차라리 목사님께서 예전에 예수님이 행했던 마술이라도 보여줬더라면 신기해서라도 성경의 말씀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다음 해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나는 철학으로 관심을 돌렸다. 철학을 선택한 이유는 내가 이렇게 이 병으로 고민하는 것들이 어쩌면 세상의 작은 일부분이며 많은 현인들이 이미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경험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력의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확고한 가치관을 가진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나약한 내 마음도 어떤 확실한 기준점을 잡고 단단해 질 거 같았다.
학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었다. 거기서 무작정 철학책을 찾아보니 공자, 맹자 등 과거의 현인들부터 시작해서 근대의 철학자들까지 종류가 많이 있었다. 그냥 그 책들을 무작정 읽었다.
철학에 대한 대체적인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철학은 일단 엄청 어려웠다. 요즈음에는 철학책도 쉽게 나오는 책을 많이 봤다만, 그 당시 도서관에 있던 철학책들은 쓰이는 단어도 어려웠고 문법은 많이 틀렸었다. 자세히 보면 주어 서술어 호응이 안 맞는 문장이 많아서 독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한 문장, 한 문장이 판사의 판결문보다 길고 재미없었다.
그리고 철학은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너무 마음이 힘든데, 오늘 당장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데 철학책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선과 악에 대해서 끝도 없는 토론을 하고 있었다. 철학자들을 보면 현실과 약간 동떨어진 사람 같았다. 고상한 철학자들의 완벽한 논리를 다 안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질수 있을까? 이 사람들은 알코올중독자처럼 생각을 하는 사람들 같았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쓴 책을 앞에 놓고 나는 읽을지 말지 고민했다.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어야 내가 마음이 건강할 수 있을까?
게다가 철학자들의 삶도 정서적으로 꼭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들조차도 삶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어떤 이는 죽음을 선택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들에게 실망하였다. 실제로 내 건강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다른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