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파킹 이야기 중

by 참새

#5

MVG 중에 여성 고객들이 많다. 요즘 유행하는 옷과 아이템을 걸친, 스타일리쉬한 그녀들을 보는 것이 좋았다. 나는 그들을 사모님이라 불렀다. 배우 장신영을 닮은 고객이 있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려 보였다. 멋진 그녀는 BMW에서 도도히 내렸다. 내게 차키를 맡기며 유유히 쇼핑하러 떠났다. 손끝이 스칠 때도 있었다.


그녀가 앉았던 시트에 내가 앉는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잡았던 핸들을 잡는다. 그녀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다. 레몬 향기가 났다. 그녀가 좋아하는 아기자기한 잡동사니가 눈에 들어온다. 시동을 켜면 라디오 채널에서 음악이 나온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을 이렇게 쉽게 공유해도 되는 걸까?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누구와 결혼을 했을까? 의사? 판사? 상상하며 그녀를 잠시 느껴본다. 여기까지가 내 자유다. 그녀와 나는 찰나의 시차로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어쩌면 그녀와 나는 과거에 만났을 수도 있다. 20년 전쯤, 한 고등학교 축제에서 친구의 친구로, 혹은 후배로 만났을 수도 있다. 아니면 같은 학원, 독서실에서 한 번쯤이라도 스쳤을 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그녀를 봤다면 동경 비슷한 느낌이 들었을까? 어디서부터 우리는 말도 섞지 못할 만큼 멀어져 버린 걸까?

#6

나는 뱃살이 없다. 내 생활에 안주하지 않는 이상 1cm의 뱃살도 허용하지 않기로 했다. 매일 팔굽혀펴기와 다리 들어올리기를 한다. 항상 몸에 긴장이 흐른다. 겨울이 되면서 받은 동복은 빨간색 코트, 갈색바지와 목티, 검은 구두이다. 날씬한 내 몸에 착 달라붙어, 옷빨이 살아났다. 내 피부는 유난히 밝고, 매끄러웠다.

아침 조회 시간이 기다려졌다. 햇빛이 유난히 강하게 느껴졌다. 가벼운 걸음으로 1층 MVG라운지로 걸어갔다. 직원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한다. 나와 15살 이상 차이 나는 아이들이 나를 형, 오빠라고 불렀다. 그들은 내게 친절하다. 아침의 활기찬 분위기가 좋다. 사람이 있는 곳엔 항상 웃음이 있다.

누군가 내 주위를 서성였다. 수신호 일을 하던 지혜였다. 20대 중반의 키가 크고 예쁘장한 그녀는 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내 이름이 ‘원식’이라서) “저 혹시 투식이는 없어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그다음 날부터 그녀는 날 보면 “원식, 투식” 하면서 놀렸다. 너무 유치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조회 시간마다 나를 힐끗힐끗 보더니, 나중에는 나만 계속 째려보듯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곤 했다.


그녀는 날 때리기도 하며 장난을 쳤다. 급속도로 친해졌다. 같이 밥을 먹다가 눈이 마주치면, 입을 벌려 입 안의 씹다 만 내용물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한마디 했다. “니 얼굴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른다. 그녀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하면서 뜻 모를 소리만 하였다. 그러면서 혼자서 뭔가 재밌다는 듯, 큭큭대며 웃었다.


그녀와 밥을 자주 먹었지만, 진지한 대화를 나눠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아재개그를 좋아했다. 나는 그녀에게 ‘노잼, 핵노잼’이라고 절대 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 했다. 세상에 20대가 이렇게 썰렁할 수 있냐고 구박했다. 이런 유전자가 있는 것 같다. 매사 가벼운 아이. 어쨌든 나는 그녀 덕분에 발렛 일이 확실히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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