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상가 지하에 내 책방 겸 작업실 장소로 예정해 놓았던 곳이 있었다. 구체적인 사업 실행을 위해 이틀 전 동생이 그 곳을 보려고 대구에서 내려왔다. 그곳이 상가 세도 쌌고 위치에 좋았기에 나는 기대가 컸었다. 그런데 동생이 그곳을 찬찬히 보더니 “이거 일이 너무 많겠는데.. 안에 치워야 할 것도 많고, 배선도 너무 복잡하고, 한쪽 벽면은 통유리로 전부 갈아야겠는데? 행님아 다시 알아보면 안 될까?”라고 하였다. 대충 견적을 내 보니 예상보다 비쌌다. 엄마도 공사비에 500만 원 이상은 보태지 않을 거라고 하였다. 어차피 동생이 도와주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기 어렵다.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도 반드시 필요했다. 처음부터 다시 사무실 장소를 알아봐야 할 것 같다.
기대하던 일이 좌절되면 누구나 힘들다. 이 데미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마음을 비워야 한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이 있었던 아우슈비츠 감옥에서는 성탄절부터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 간의 사망자가 제일 많았다고 한다. 그것은 가혹해진 노동조건 탓이 아니라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고, 절망감을 뒤덮고,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인도의 간디는 ‘행복은 의도적으로 욕심을 줄이는 데서만 온다’고 하였는데, 단순한 행복 차원이 아니라 진짜 생존을 위해서라도 모든 희망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오랫동안 ‘상황’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믿었다. 누가 봐도 힘든 상황이 오면 누구나 마음 아픈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작가들이 있다. 나도 최근에 알았는데 작가들은 정말 희망이 거의 없다. 출판도 미지수이고, 그것이 가능해도 최소한의 생활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런데 똑같이 암울한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잘 이겨내고 어떤 사람은 쉽게 나가 떨어진다. 이것 때문에 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사실 이런 결론이 좀 진부하고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오늘처럼 뚜렷한 확신이 든 적은 없었다) 궁극적인 행복이란 밝은 미래에서 오기도 하지만, 욕심을 줄이는 데서 더 크게 온다. 그동안 내가 이 사실을 막연하게 알았지만 이것은 정말 현실이었다. 그래서 행복은 ‘상황’보다는 ‘의지’의 문제이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좀 더 의심 없이, 사실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수 많은 심리 상담 사례집을 보면 고민이 있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신의 ‘상황’을 바꾸려고 무진장 노력한다. 바꿀 수 있는 상황은 바꾸는 게 제일 좋다. 백수라서 우울하면 일자리를 알아보고, 직장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 이직을 하는 것이 제일 좋다. 하지만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다. 우리가 처한 근본적인 환경이나 가족, 타인들의 생활방식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결국에는 우리의 태도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상담치료의 핵심이었다.
난 요즘도 계속 감사일기를 적는다. 지금 내 생활은 완전 거지 백수이지만, 그래도 ‘따뜻한 밥을 해주는 엄마가 있어 감사합니다. 동생이 있어, 친구가 있어 감사합니다.’ 이렇게 적는다. 단순히 욕심을 버리는 것을 초월해서 삶에 감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인 상황이나 사실을 바꿔주는 것이 아니다. 감사일기를 쓴다고 내 책이 출판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냥 내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슬론 윌슨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세뇌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철학자 에픽테토스도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라고 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외부 상황이 아닌, 밝은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어느 곳에서도 가슴 뛰는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피할 수 있는 시련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행동이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시련을 견디는 것은 자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시련에서 여전히 유용한 의미를 찾아낼 수는 있다. (…)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