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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May 30. 2018

행복을 바라지 마라

여자친구가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를 왜 안 좋아하느냐고 투정 부린 적이 있다.


오늘은 내가 진행하는 심리학 책모임이 있는 날이다. 책 제목은 윌리엄 글래서의 ‘선택이론’이다. 박사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는 관심을 끄라고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 바꿀 수 있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정보뿐이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좋은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을 자신이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남을 간섭하려고 든다. 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기만을 바란다. 내 마음대로 그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하지만 내가 억지로 그 사람을 간섭할수록 상대방은 내게서 더 멀어진다. 내가 오히려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었을 때,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었을 때, 그래서 관계가 좋아졌을 때, 그나마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대로 조금이라도 행동한다.  상대가 끝내 바뀌지 않더라도 할 수 없다. 이 책은 이 사실을 계속해서 설명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다른 사람뿐만이 아니다. 작가는 우리의 행동에는 총 4가지가 있다고 한다. 1. 활동하기, 2. 생각하기, 3. 느끼기(불안하기, 우울하기 등), 4. 신체반응하기(심장 뛰기, 이완하기 등)가 그것이다. 박사는 이 4가지는 모두 연결돼 있다고 한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바뀌면 다른 모든 것도 바뀐다는 것이다. 내가 심장이 빨리 뛰면 저절로 불안을 느끼고, 걱정하고(생각), 쉼호흡을 하려고 한다(활동). 이렇게 모든 것은 다 연결이 돼 있다.


이 중에서 느끼기와 신체반응하기는 내 의지대로 잘 안 된다. 내가 행복해져야겠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신체반응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심장이 빨리 뛰어야지! 결심한다고 해서 지금 바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이 중 생각하기과 활동하기는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있다. 내 생각을 메모지에 적어가면서 긍정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내가 감사일기를 쓰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또 내가 명상을 하거나,에세이를 쓰거나,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거나, 이런 행동은 당장이라도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느끼기(감정)이나 신체반응하기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내 마음대로 바뀌기를 원한다. 이것도 우리의 욕심이다. 내가 행복(감정)을 바란다는 것은 타인의 행동을 바꾸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모한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내 행동만 바꿀 수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예로 들어보자. 내 동생은 제수씨와 데이트를 할 때 커피숍에서 같이 시나리오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같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 조금씩 느껴진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 그 자체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 지금부터 사랑하자’고 해서 사랑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같이해야 할 일에 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묵묵히 계획을 세운다.



마찬가지로, 행복을 바란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행동(활동하기)뿐이다. 우리는 행복을 바라서도 안 되고, 내 기대만큼 행복해지지 않는다고 해서 짜증 낼 필요도 없다. 안 행복해져도 어쩔 수 없다. 감정은 원래 우리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다. 행동을 바꾸면 그때 감정도 바뀌고, 생각도 바뀌고, 몸도 이완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는 ‘간접적으로는’ 모든 것을 바꿀 가능성은 있다. 


최근 내 강의에 사람이 많이 안 왔다. 4명이서 수업했다. 우울했다. 나는 그 우울한 감정에 대해서 또 걱정했다. 다시 그 다음날 아침에 힘을 내서 생활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농구를 하고, 도서관에 왔다. 예전에 대구에 놀러 갔을 때도 공황이 와서 힘들었지만, 그 다음날은 또 기분이 괜찮았다.


요즘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다시 괜찮아진다. 공황 짬밥 22년이면 모든 마음의 병이 다 허상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실제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는 없다. 약물도 필요 없다. 나는 그저 집에 와서 책모임 준비를 하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다. 그러면 부정적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부정적 감정에 휩쓸리거나, 그 감정을 따라다니면 안 된다. 마음이 아무리 불안해도 그냥 관조한다. 그때는 책상에 앉아서, 팟캐스트 대본을 쓴다. 책 출판을 위해서 글을 쓴다. 나는 안다. 지금 마음이 불안하지만,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으면 금방 이 감정이 지나갈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흐름이다.


윌리엄 글래서 박사는 ‘선택이론’을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나쁜 것(행동방식, 감정 등) 또는 좋은 것(긍정적 방식, 좋은 감정 등)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부정적 감정에 대해서 걱정만 하고 있으면, 내 마음은 지금 상황이 진짜 심각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면 심장이 빨리 뛰고, 그러면 또 나쁜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무의식은 다시 걱정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 연쇄작용을 끊는 것은 (불안한 와중에서도) 행동하기이다.


우리는 행동을 통해서 좋은 것을 우리 마음에게 보여줘야 한다. 내가 걱정만 하고 있다면 어떤 긍정적인 것도 우리 자신에게 보여줄 수가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마음이 비록 불안할지라도, 그 감정을 무시하고) 책을 출판하고, 여자와 약속을 잡고, 운동하고, 좋은 옷을 입으면 최소한 흥밋거리들을 내 마음에 보여줄 수가 있다. 그러면 내 마음도 그 좋은 것들을 선택할 수가 있다. 우리 마음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본다. 우리는 이런 행동은 쉽게 할 수 있다. 솔직히 우리가 우울해도 밥을 먹고,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부정적 감정은 데스노트의 악마와 같다. 엄청 무섭게 생겼지만, 그 모습 자체로는 우리에게 어떤 해도 가할 수 없다. 데스노트의 주인공(라이토)도 처음에는 저 모습에 놀라지만, 나중에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나중에 악마와 친구처럼 지낸다 ㅋㅋ 그 영화에서도 어떤 사람이 저 악마의 형상에 놀라서 사고가 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가 저 악마를 무서워한다면 진짜 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시하면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저 악마 앞에서도 내가 할 일을 하면, 그것이야말로 저 악마를 농락하는 것이다.


물론 저 무섭게 생긴 악마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기가 쉽지는 않다. 당연히 불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믿음을 가지고 행동만 해야 한다. 그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다. 원래 우리 자체는 완전한 존재이다. 신이 그렇게 설계하셨다.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어도 행복한 것이 우리의 신체이다. 이 정도 불안한데도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원래 힘든 와중에 진정한 믿음을 보여줄 수 있다. 이 힘든 과정이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일종의 시험이라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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