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아만다 사이프리드(영화배우)의 큰 눈망울이 보고싶었다. 그녀는 너무 예쁘시고 남자를 행복하게 만든다. 예전에 봤었던 <레터스 투 줄리엣>이라는 영화를 다운받았다. 영화는 이탈리아 베로나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녀는 영화에서 50년 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슬퍼하는 누군가의 편지에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보라고 굳이 답장을 한다. 그 답장에 용기를 얻어 편지의 주인공(할머니)은 영국에서 이탈리아로 굳이 건너온다. 그리고 그녀는 그 할머니가 50년 전 연인을 찾는 여행에 굳이 동행한다. 50년 전의 희미한 기억과 그 사람 이름만으로 그 넓은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사람을 찾는단 말인지..
내가 볼 땐 이 영화는 모든 것이 잉여적이었다. 이 세상에 누가 저렇게까지 행동할 사람이 있을까? 하긴 그러니깐 영화의 소재가 되었겠지만.. 그런데 이 영화의 결론이 재미있다. 그 할머니는 끝내 그 연인을 찾아내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할머니의 손자와 또 연인이 된다. 때로는 이런 일을 왜 해야 하나? 할 정도로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일에서 영향력 있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나보다.
이런 영화를 보는 것이 하나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지금 한가하게 영화를 볼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하나도 안정적인 것이 없다. 뭐라도 해야했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을 계속 괴로히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에 대한 압박이 더 비효율적이고 그것이 그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적 엄마가 공부하라고 해서 억지로 했을 때는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내가 호기심에서 자발적으로 공부를 했을 대는 성적이 좋았다. 어쩌면 공부란 것은 내가 하고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나도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무작정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로맨틱한 여행을 하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기다리다보면 이 영화처럼 더 좋은 결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답답한 마음에 친구와 무작정 진해에 놀러갔을 때에도 그런 심정이었다.
그 영화를 보면서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놀라운 변화다). 그냥 주인공이 예쁘고 영화가 재미있다는 생각만 하였다. 나는 초등학생 때에도 친구들과 집에서 비디오 보는 시간이 행복했다. 과거의 그 행복했던 순간과 지금의 순간이 그대로 연결이 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똑같이 영화를 보고 즐겁게 웃는다. 다만 삶의 무게가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느끼는 것 일뿐, 사실은 달라진 것 없을 수도 있다. 행복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그저 내 생각만 달라진 것일 뿐.
요즘도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그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안정적인 사람들일까? 그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죄책감을 가질까? 아닐 것이다. 그냥 어릴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영화를 본다.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지금껏 나는 지나치게 죄책감을 느끼고 살았다.
중학교 때 기말고사가 끝나면 공부로 경쟁하던 친구들과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같이 축구를 하며 뛰어 놀았다. 그때도 정말 행복감을 느꼈다. 경쟁은 그저 잠깐일 뿐이다. 내가 성적이 좋지 않았어도, 그것이 저 친구 때문이라도 막상 놀 때에는 그런 거 못 느꼈다. 마냥 재미있었다. 현재를 즐길 줄 아는 것은 내가 성공하지 못했을 때에도 나를 위로하는 보험일수도 있다. 그리고 경쟁이나 성공과 같은 것들의 비중은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부분일 수도 있다.
언젠가 공무원 시험을 치고 나왔을 때 같이 시험을 쳤던 여자후배가 같이 밥 먹자고 전화가 왔다. 나는 그때 시험을 잘 못 쳐서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지금도 후회가 된다. 그 여자후배와의 인연을 생각했다면 그때 맛있는 거나 사먹을 걸, 그 시험 한번은 지나서 생각해보면 티끌만큼도 의미가 없는 건데, 결국엔 그런 추억이 더 남는 것인데. 쪼개서 생각해보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 시험, 경쟁은 그저 한 순간이다. 이 세상의 원래의 행복은 사람들과의 추억 같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