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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Jul 20. 2015

싸움

얼마 전 내가 가입한 인터넷 독서모임 카페에서 큰 다툼이 있었다. 운영자들과 우수회원들간의 싸움이 일어나 번진 것이다. 그 풍경이 내겐 매우 낯설었다. 나는 어른이 되면서 이 세상의 (연인들 사랑 싸움 빼고) 진정한 싸움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이란 모든 일에 신중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를 졸업 후에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 봤고 공익 근무로 공무원들의 삶도 이해했다. 회사에서 비 정규직으로도 오래 일을 해 봤다. 이들의 삶은 대개 수직적이다. 자신들의 재량과 의사표현, 관심의 범위가 정해져 있다.

공무원들은 자기 관할 구역 밖에는 격렬하게 관심 없고, 회사원들은 다른 팀 일에 확실한 선을 긋는다. 7급은 9급의 불만이 뭔지 모르고 과장은 대리의 불안을 생각지 않는다. 이 사회는 구성원들이 굳이 싸울 필요가 없거나, 싸울 엄두를 못 낼 정도로 체계적이다.


물론 이런 사회에서도 사람들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경우를 보긴 했다. 근데 그건 감정적인 다툼이라기 보다는 상황적, 법적으로 자신이 좀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한 ‘액션’에 지나지 않았다. 냉정한 법과 규칙, 24시간 작동되는 카메라가 불필요한 싸움을 다 막아주고 있다. 다들 앞만 보고 분주하게 달렸다. 사는 것도 빠듯하여 자기 밥 그릇 이외에는 감정적인 에너지 소모를 하지 않았다. 내 기억에서 ‘싸움’은 점점 잊혀져 갔다. 이것은 내가 사회로 뛰어들고 무감각하고 차가운 자본주의 피라미드 바닥에서 서러운 차별을 버티면서 알게 된 것들이다. 나는 그 동안 응어리진 감정을 뱉어내지 못해 상처도 깊었다.


< 그때 그가 나에게 준 고통은 무례한 행동이나 주먹질이 아니었다. 넝마 같은 옷에 초라한 몰골을 하고 서 있는 나를 인간의 형체를 한 물건쯤으로 여겼는지 말은 물론 욕지거리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욕을 하는 대신 그는 장난하듯이 돌멩이 한 개를 집어 나에게 던졌다. 그 행동이 나에게는 맹수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가축들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자기와는 닮은 점이 없어서 벌을 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짐승을 향해 하는 행동같이 느껴졌다. > –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인터넷 카페에서 어른들이 싸움을 한다. 진귀한 광경이다. 이 곳은 서로의 위치를 묻지 않는다. 그저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분모만 있을 뿐이다. 대기업 임원, 판사, 변호사, 대통령, 최저임금 알바생, 회사 경비, 1년 계약직들이 동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싸우기까지 한다. 우리는 회비 1원도 걷지 않기 때문에 돈 때문에 싸우는 것도 아니다. 난 이 싸움에 계산 없는 감정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동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싸움이 오가는 이 곳은 내 상처가 치유되는 따뜻한 공간임이 틀림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의사와 관계없이 싸운다는 것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우리에게 이런 공간이 허용된 것이 꿈만 같다. 싸움이란 존재 자체가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할 수 있는 특권이다. 유치원 때 친구들과 싸움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비평등의 설움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른다. 누군가와 눈을 똑바로 보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상대방이 내 말을 그나마 듣고 있는 저 모습이, 내 말에 무려 화까지나 내어주고 감점에 격앙되어 내게 응수하는 저 모습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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