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의 생각
나는 집착이 심했다. 사실 지금도 매력적인 여성을 보면 집착할까 봐 마음을 경계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성에 대한 집착으로 힘들 것이라고 보고 이 글을 쓴다. 집착의 증상은 고약하다. 좋아하는 그가 옆에 있을 때는 한없이 기쁘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면 너무 보고 싶고, 초조해지기까지 한다. 오로지 그에게만 관심과 에너지가 집중돼 현재 내 모습은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진다.
지난해 영화의 전당에서 봤던 ‘굿바이 어게인’(원작 프랑수아즈 사강의‘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그 증상을 볼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40대로 나오는 중년 여성(잉그리드 버그만)에게 관심을 보는20대 연하 남성(앤서니 퍼킨스)이 나온다. 돈이 많았던 그는 그녀에게 열렬하게 구애했고, 그녀도 그가 싫지 않았기에 결국 둘은 사귀게 된다. 이후 그는 일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그녀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린다. 의미 없이 혼자 시내를 돌며 시계탑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과거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그를 싫어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계속된 집착에 지쳐 이별을 고한다.
집착 끝엔 뭐가 있는 걸까. 그녀 너머 오아시스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그저 신기루만 보인다. 대단한 쾌락이라도 있을 것 같지만 허무함만 쌓일 뿐이다. 이는 비단 이 현상뿐만 아니라 모든 중독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기도 한다. 철학자 라깡은 이 같은 갈구의 끝을 대상a라고 칭하고 경계했다.
집착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은 다음 사랑이 찾아왔을 때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레마크르의 소설 ‘개선문’(2차대전 전야 파리를 무대로 두 남녀의 위태로운 인생을 그린 작품)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의사 라비크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조앙 마두에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 한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가 게슈타포(나치 정권 정치경찰)에 의해 죽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듯한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후 인간적인 감정을 죽인 채 일상생활의 무한궤도 내에서 반복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저 창녀들과 향략적인 쾌락을 즐길 뿐이었다. 밤거리에서 우연히 사랑스러운 조앙마두는 그가 알고 지내던 창녀들과는 달리 어딘가 모르게 사랑스럽고 매력적이었지만 그의 의식과 생활을 바꿔 놓지는 못했다.
조앙마두에게 집착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보자. 그녀가 일정한 시간에 그의 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그 시간에 일부러 외출한다. 그녀가 보고 싶어 집앞까지 찾아가지만, 결국 고뇌하고 들어가지는 못한다. 심지어 그녀와 함께 휴양지에 놀러 갔을 때 그녀에게 보트를 태워주겠다는 남자들 무리에 그녀를 순순히 보내기도 한다. 그녀는 라비크보다 나이가10살 이상 어렸고, 비록 조연이지만 영화배우를 할 만큼 예뻤다. 그런 그녀가 마음을 달라는 말을 했을 때 라비크는 거절한다. “이런 시국에 아름다운 당신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운이 좋은 편이야”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더 애정을 주지 않고 그 상태로 만족해버리는 것이다. 그의 이런 태도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전운이 감돌던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look before you leap.(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그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평화를 깨트리고, 자신을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우선 그 원인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집착의 원인이(라깡이 말한 대상a처럼)우리 무의식이 어떤 대상이나 가시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는 우리 무의식의 선택이라는 것도. (정신의학자 윌리엄글래서의 ‘선택이론’ 참고)
내가 쓴 논문 ‘이기론’(理氣論, 조선 성리학에서 차용)에 따르면 우리 무의식은 2가지 메시지에 따른다. 1번은 자연세계에서 동물이 가질법한 성적 욕구를 비롯한 동물적, 본능적 욕구이다. 그리고 2번은 좋은 느낌을 추구하는 욕구이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사랑에 빠진 남녀가 여럿 나온다. 이때 무의식(1번과 2번)은 그 사람(대상)에게 온통 마음이 뺐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여주인공 춘희는 철수에게‘내가 사랑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했던 감정이었다’라는 말을 한다. 이는 2번에 대한 의식이 튀어나온 것으로 1번과 2번이 각기 다르게 작용함을 보여주는 예시다.
실제 2번 존재 유무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다. 2번은 인간에게만 있다. 인간은 성관계가 주는 쾌락(2번에 해당)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피임기구를 개발했다. 반면 동물은 쾌락만을 목적으로 성관계를 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1, 2번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욕구를 느끼게 한다. 영화 연가시를 예로 들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 영화에서 기생충이 우리의 뇌를 지배하고 나서 자기 생식을 위해 우리를 물로 유도한다. 그때 이끌림은 우리가 ‘물을 먹고 싶다’는 욕구로써 나타난다. 그것처럼 우리 몸에서 단백질이라는 영양분이 필요하면 고기가 먹고 싶다. 아 물론 고기를 먹을 때는 행복하므로 2번도 충족된다.
그런데 무의식이 항상 바람직한 선택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예로 들면, 화학조미료가 다량 첨가된 자극적인 음식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도 있다. 우리가 어릴 때는 그런 음식에 이끌린다. 하지만 그 음식이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너무 자극적인 맛은 사실 먹을 때도 그렇게 좋은 맛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오히려 몸에 좋은 음식에서1, 2번을 충족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여전히 초딩입맛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미숙한 선택이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상과 같다.
나중에는 이런 집착의 개념이 더 확대되어 단순히 대상에 빠지는 것 말고도 그를 소유하려 하거나,통제하려고 하는 관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내용은 나중에 설명하겠다. )
그렇다면 결국 무의식이 좋은 선택을 하게 만들면 된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것보다 몸에 더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되듯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녀를 더 보고 싶어 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집중하거나 그를 통제하지 않는 것이1번과2번을 충족해주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 집착이 사라질 것이다.
결론만 얘기하면 우리는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무의식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일기를 쓰는 것이다. ‘그와 한 번 더 만난다고 해서 그와 잘될 확률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더 집중하고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그나마 잘될 확률을 올리는 길이다’라는 취지의 글을 일기에 쓰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치가 않다. 저렇게 이성적으로 암시가 잘 안 된다. 실상은 그녀가 보고 싶고, 주말에 저 멀리 경치 좋은 곳으로 드라이브 가고 싶다. 그럴 때는 지금 현재 옆에 있는 소중한 가족이나 내가 하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다. 오로지 미래 시점에 그녀와 함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증상은 자꾸 그녀의 외모에 집착하고, 또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외모도 자꾸 돌아보게 된다. 길을 가다가 멋진 사람을 보면, 그녀는 나보다 저런 사람을 더 좋아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좌절한다. 그런데 무의식의 작용을 안다면 우리 마음에서 한 발 물러나서 입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위의 증상들을 가만히 보면 내가 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가령, 그녀와 만나서 놀러 가야지만 행복하고(만일 그녀가 약속을 취소하면 주말 내내 괴롭다)또 조금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녀와 사귀어야지, 혹은 결혼해야지, 그녀가 나를 나만큼이나 좋아해야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것에는 어떤‘조건’이 있고 이를 충족해야지만 행복하다.
또 데이트할 때 그녀 또는 나의 외모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외모 같은 것들은 항상 일정한 컨디션이 될 수 없다. 매일 다르게 보이고, 내 상태가 안 좋으면 그날 하루 기분이 엉망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다 변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절대적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사실 가변적이다. 무의식적으로 아빠와 애착이 있는 여성은 아빠를 닮은 사람에게 이끌린다고 한다. 반면 아빠와 갈등이 있는 여성은 아빠와 반대 성향의 이성에게 자신도 모르게 끌리고 한다. 또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내가 여자친구와 이별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상처를 빠르게 치료해주었던 역할을 해서 좋아 보였던 것일 뿐이다. 이런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감정은 아빠와의 관계가 개선되거나, 자신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거나, 자기 마음의 생채기가 끝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그때는 심각했더라도 말이다. 원래 삶의 방향성을 잃었을 때 어떤 것에 더 쉽게 중독된다.
그리고 상대의 외모에 중독되다시피 빠져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재밌는 가정을 해보자. 만약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슈렉과 피오나 공주처럼 외모가 다 변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집에만 틀어박혀서 자기 외모를 비관만 하고 있을까. 반대로 생각해서 모두가 다 차은우 장원영처럼 다 외모가 변했다고 모두가 다 킹카, 퀸카가 될 수 있을까. 아니지 않을까. 개미는 10마리 중에서 열심히 일하는 놈은 3마리 정도라고 한다. 신기한 것은 그 일꾼들만 모아놓아도 일하는 개미는 3마리뿐이라고 한다. 약육강식에도 강자와 약자의 비율이 있듯이 미묘하게 미의 기준이 나뉠 것이다. 미에 대한 기준이 새로 정립되고 인식될 것이다. 가령 좀 더 짙은 녹색깔이 매력적인 요소로 바뀔 수도 있다. 외모라는 것은 어차피 절대적인 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만족을 주는 상황이 바뀌면 내 눈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이렇게 가변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것들에 마음을 투자해야 하나? 그리고 이런 ‘조건부’ 행복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필히 불안, 초조, 공포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인류는 그동안 이런 부정적 감정의 덕을 많이 봤다. 부정적 감정은 생존에 필요한 여러 이점이 있다. 공포를 느낌으로써 우리는 안전한 곳으로 피할 수 있다.분노와 증오라는 감정을 느끼는 이유도 다른 가해자에게 위협을 가할 힘이 생기고, 자신의 영역과 가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물의 방식이기도 하다. 동물들은 원래 어떤 대상이나 가시적인 것에 집중한다.(1번의 원래 형태) 예를 들어, 토끼는 눈앞에서 맹수가 자신을 위협해도, 그 맹수가 사라지고 나면 공포도 사라진다. 동물들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동물들의 인과관계는 이 단순한 패턴에만 묶여 있다. 그러다가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인간에게 이(理)가 생기고 삶은 복잡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좋은 느낌’을 추구하게 됐다. 그래서 동물들과는 달리 명상을 하거나, 현재를 음미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理)가 있음으로 해서 새로운 동력을 쓸 수 있게 됐다. 사실 그동안 동물은 ‘상’과 ‘벌’과 같은 기제로써 동력을 얻었다. 좋은 느낌을 주거나 불쾌한 느낌을 주는 호르몬에 따라 조건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현대사회에도 이런 방식은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시험을 칠 때 우리는 성적이나 등수(상) 같은 가시적인 것에 집중한다. 그리고 시험을 못 쳤을 때의 공포, 처벌로써 자신을 단련시킨다. 그런데 이런 방법은 1번과 2번은 제대로 충족시킬 수 없다.
영화 ‘위플래시’에서는 자신의 제자를 최고로 만들기 위해 오로지 채찍질(벌)만을 한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1번은 충족시켜줄지언정 2번을 만족시켜주지는 못한다. (여기에 거부감이 드는 것을 보면 우리의 궁극적 정체성이 2번에 대한 의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원하는 대학 합격(상)이라는 원하는 달콤한 꿈만 믿고 자신을 혹사 시키는 경우도 있다. 만약 자신을 희생해서 원하는 대로 되었다면 마음이 덜 아프지만, 시험 결과에만 목매달아온 청소년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경우 자살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더 성공하고 행복하기 위해 시험결과를 신경 썼는데 부작용이 더 많은 경우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理)가 가진 다른 한편의 작용으로 대상이나 결과가 아닌, 과정이나 지금 이 순간에서 오는 좋은 느낌을 추구하는 것을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시험의 결과보다 시험을 치는 과정에서 공부를 순수하게 좋아하게 되기도 한다. 새 책의 향기나, 글씨체 같은 것들이 예뻐서 공부하기도 한다. 원래 필기를 좋아하지만, 필기 할 일이 없었는데 시험이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이 더 좋아지기도 한다.
이처럼 조건부 행복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또는 특정한 목표나 레벨이 아니라 저렙에서도, 고렙을 향하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이(理)의 만족감을 얻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 심취(몰입)하다 보면 실제 결과가 잘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대상이나 결과에 집중할지, 과정이나 현재에 집중할지, 두 가지 방법 중에 어떤 기제를 쓰면 좋을지 계속 갈등하는 존재이다. (전자를 A모드라고 하고 후자를 B모드라고 하자.)
우리가 행복이라고 느끼는 감정은 지금의 ‘상황의 해석’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에게 공포나 불안이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하면 지금이 ‘위기 상황’이라고 설정할 것이다. 반면에 지금이 행복하다고, 평화롭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이 그런 감사한 상황이라고 느껴서 그런 것이다. 이러한 믿음도 무의식이 어떤 기제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바뀔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에 걸린 것처럼 나쁜 감정이 들거나 혹은 그 당시의 생각들에 너무 절망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면 그런 부정적 믿음과 그에 따른 감정들은 쉽게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는 이(理)의 작용으로 좋은 호르몬이 주는 느낌을 좋아하고, 불쾌한 호르몬이 주는 느낌을 싫어한다. 그리고 좋은 느낌이라고 하더라도 가시적인 대상이 주는 쾌감은 필히 부정적 감정을 수반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좋은 느낌을 더 좋아하는 동력을 사용하는 것이 1번과 2번에 더 유리하다.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책 ‘쓸모인류’에 나오는 주인공인 빈센트는 현재, 그리고 과정을 진심으로 즐긴다. 그리고 그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얘기를 한다. 그는 “지금 사회와 사람들은 너무 빠른 것만 원해. 빠르다는 건 뭔가 소중하거나 필요한 것들을 놓친다는 거야. 그래서 난 가능한 ‘느린 사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결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나중에는 느린 게 더 빠르다라는 것을 깨닫게 돼”라고 말한다.
정리하면 우리는 그동안 어떤 대상이나 가시적인 것에 집착하고, 조건부적이고, 통제 불가능하거나, 미래 상황에서 오는 쾌락만을 추구하면서 1, 2번을 충족시켜 왔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는 2번이라는 존재 때문에 그런 방식이 비효율적이다라는 것을 알았다. 합리적인 이성이 있다면 선택지는 통제 가능한 현재의, 무조건적인 감사함과, 언제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B모드)이 더 큰 동력을 낼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현재가 주는 행복함을 느끼면서 더 강하고 효율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1번과 2번이 상호보완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번이 충족되어야 2번도 충족하고, 그 반대로 2번이 없으면 1번도 완전히 자리잡을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우리 무의식(동물)이 대상이나, 외모나, 성적이나 결과로 현실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동물은 원래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해 왔으니깐. 무의식(동물)이 대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과 1번과 2번의 작용이 대상에 가치를 부여해 집착하는 것은 개념이 다르다.)
조미료가 있어야 재료 본래의 맛이 더 잘 느낄 수 있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아무리 현재에 살고, 감사하게 살아도 결국엔 자연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못 본 척 하는 것도 1번과 2번을 만족시켜 주진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 개선문의 라비크가 집착이 싫다고 해서 젊고 아름다운 외모의 조앙마두를 뿌리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뜻이다. 집착만 하지 않으면 그녀는 충분히 좋은 연애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현재의 삶을 더 빛나게 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현재에 대한 좋은 느낌의 수단으로서만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 위에 잔잔하게 유영하는 오리는 평화롭게 보이지만, 물밑에서 치열하게 발을 움직인다. 우리도 이처럼 나른하고 연속적으로 보이는 사랑의 관계에서 긴장하면서 미묘한 줄다리기를 계속 해야 한다. 그녀가 있음으로 현재가 더 빛나는 지점까지는 우리는 헤엄쳐야 하고, 그 이상이 넘어가서 현재가 다칠 것 같은(현재를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이 잘 들지 않는) 지점에 이르면 바로 멈추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한다. 라비크처럼말이다. 그 기준은 항상 현재, 여기 이순간의 좋은 느낌이 크냐, 아니면 여기가 아닌 어떤 대상에 집착하거나 미래의 어떤 시점을 기대하고 있냐를 봐야 할 것이다.
집착의 반대말은 현재에 대한 감사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상이나 가시적인 것에 집착하고, 조건부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것들은 주로 미래 시점의 부정적 감정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 반대의 개념은 전부 지금 이 순간에 대한 감사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현재를 중시하는, 외모 따위를 현재에 느끼는 좋은 느낌을 위한 수단으로 하는 B모드에서 1번과 2번이 더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을 무의식이 인식하고 나면 어딘가 집착하는 대신 현재의 감사함에 더 힘을 실어 줄 것이다.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니깐.
이글을 마무리 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에 집착할까봐 걱정이 컸다. 그래서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다.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다. 어차피 집착의 대상은 ‘허상’이라는 것을 알았고, 자극적이면서 건강에 마냥 좋은 음식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도 알았고, 내 가마정이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에서 감사함을 느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감사일기의 가치를 알게 됐다. 나는 분별력을 가지고 감사일기를 또박또박 쓸 수 있다. 행동할 수 있는 한 부정적 패턴(A모드)가 나를 잡아먹지 않게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인지조차도 못했던 이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다는 것이 나를 집착에 빠지지 않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