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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Apr 28. 2023

상(常)이 모든 고통의 원류다

(제가 결국엔 백수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엄마 몰래 대출받은 사실이 들켜서ㅠ  이 글은 며칠 전에 쓰던 글을 마무리 한 것입니다. 제가 쓴 논문 이기론(理氣論)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도서곤 가는 길. 


현재에 감사해야겠다고 느낀 계기가 있었다. 사실 이 2가지 사건은 삶의 생산성을 심하게 떨어트리는 일이었는데, 만약 삶에 감사했다면 이런 낭비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주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첫 번째, 최근 한 정부 기관에서 기자단을 뽑는다길래 지원했다. 인터뷰 또는 행사 취재하면 한 달에 30만 원 준다길래 꿀알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즈음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까 고민하던 중이었기에 혹시 부담이 되지 않을까 나름 신중하게 선택한 것이었다. 유튜브 제작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라서 약간 신이 나 있는 상태였기도 했다.     


결국 기자단으로 뽑히게 되었다. OT를 한다고 해서 가니깐 ‘와~ 기자님 오셨다면서, 에이스님 왔다’면서 띄워주었다. 그러면서 현직기자님이시기 때문에 인터뷰나 취재보다는 전체를 기획하는 중책을 맡으면 어떻겠다고 분위기를 몰았고, 얼떨결에 그렇게 정해져 버렸다. 심지어 무슨 기자증 수여식도 하고 난리를 쳤다.     


그때부터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월에 30만원 받을 건데 이렇게 신경 쓸 일인가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유튜브 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힘들게 일을 줄여 나갔는데.. 그런 노력은 허사가 됐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이게 내 팔자인가.     


집에 와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주말 내내 기분이 나아지지 않아 시간만 허비한 것 같았다. 아니 아직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유튜브 제작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의욕을 잃은 것이다.     


이런 꼴을 보고 있자니 최근 읽은 책 내용이 떠오르면서 현타가 왔다. 그 책에는 ‘오직할 뿐’(Just do it)이라는 말을 새기면서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그냥 한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 나왔다. 그 사람이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저 주어진 일을 하나씩 천천히, 결과를 신경 쓰기보다는 그저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을까. 갑자기 영화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가 “누군가 성냥을 던지면 그냥 받는 거에요”라고 대사가 생각났다.     


이번 일로 그동안 얼마나 시간을 허비해 왔는지도 깨닫게 됐다. 또 그동안 얼마나 불교에서 말하는 상(常)에 집착해왔는가를 새삼 알게 됐다. 사실 그렇게 걱정하는 시간에 방황하지 않고 하나씩 콘텐츠를 만들었다면 벌써 몇 개나 만들었을 것이다. 인간은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는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 걸까.     


이번 일뿐만이 아닐 것이다. 회사에 다닐 때도 바빠서 유튜브 할 시간은 없다고 말했지만, 분명히 그 와중에도 틈틈이 물리적인 시간이 존재하긴 했다. 그 조각을 활용했더라면 벌써 콘텐츠가 수십 개는 나왔을 것이다. 어떤 것에 예열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예열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그 일이 하기 싫다는 얘기다. 각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그 일이 하기 싫다는 것. 일하는 과정을 좋아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일이 진행된다.)     

커피숍이나 사무실에서 애매하게 시간이 남을 때에도 여기는 집중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며 시간을 낭비했다. 만약 ‘오직 할 뿐’이라는 마음이었다면 거기가 어디든 그냥 무턱대고 뭔가를 했을 것 같다.     


-중독도 집착과 마찬가지


두 번째 에피소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영상을 많이 보다가, 이게 중독인가 싶었다. 어떤 날은 내가 한심하다는 현타가 와서 2일 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적도 있다. 원인을 찾던 중, 혹시 감사일기를 열심히 쓰지 않아서 중독에 빠지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중독에 빠지는 일을 의식적으로 바로 잡으려 노력한다는 것이 효과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글래서는 정신장애를 의지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행동’의 문제로 봤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깐 행복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불안을 멈춰야겠다고 다짐한다고 해서 불안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생각 없이 웃을 수 있고, 쉼 호흡을 할 수 있고, 감사일기를 쓸 수 있다. 이런 행동이 선행되면 분명히 감정에도 영향을 준다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감사일기나 명상을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한다면 분명히 이 정도의 중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감사일기를 쓰면 중독을 극복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감사일기에는 부모님의 존재나 건강해서 감사합니다와 같이 가진 자원에 대한 감사도 있지만 내일 세차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혹은 내일 일찍 일어나서 도서관에 갈 수 있어 감사하다와 같이 미래의 ‘기회’가 있음에 감사하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인간이란 2가지 이상의 감정과 욕구가 대립하게 되면 그중 한가지를 선택하게 되고 나머지를 억압해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그러 면에서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감옥에서 바퀴벌레를 잡아먹는 장면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죽을 정도의 배고픔과 싸워왔다면 벌레가 징그럽다는 생각은 의식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 원리로 내일 좋은 컨디션으로 도서관에 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감사하다고 여긴다면 중독이 주는 쾌락에도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감사일기만 썼다면 저렇게 의욕을 잃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더 큰 생산성을 위해 감사일기를 뒤로 미룬 것인데 오히려 더 비효율적인 상황이 됐다. 얼마나 손해인가.     


-결국 불안은 쾌락과 같은 이름이다  


두 사건의 공통점이 있다. 두 사건에서 불안(압박감)과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유튜브를 해서 성과를 내고 싶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가령, 왜 중독에 빠진 날 감사일기를 쓰지 않았을까를 살펴보자. 그것은 그날 여러 가지 해야 할 우선순위에서 감사일기가 뒤로 밀렸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유튜브 콘텐츠를 빨리 만들어야 한다라는 압박감이 있어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압박감과 불안은 상(常, 관념, 유튜브를 해서 성과를 내는 것이 좋다)에 따른 집착과 묘하게 겹친다. 그 둘은 케미가 잘 맞다고 봐야 한다. 한 쪽에서 압박을 하면 한 쪽에서 좋다고 넙죽 받아는 먹는 형상이다.     


또한 그렇게 불안과 집착이 자리 잡은 상황에는 합리성이 파고들 자리가 없다. 생각해보면 첫 번째 사건에서 내가 기자단에 선정되기는 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데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공황을 겪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일을 시켜봤자 30만 원 주면서 설마 많이 시킬까. 또한 중독에 빠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이드보다는 자아의 편인 ‘의식’이 약해져 있다.     


-이성의 끊김     


이 상황을 ‘이성의 끊김’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성( 理性)이 끊어지는 것은 이렇게 내 마음에 불안과 쾌락에 사로잡혀 잠깐 합리성을 잃어버릴 때이다. 당연히 바로 이런 이성의 끊김이 일어나지 않아야 자아의 의지가 무의식에 더 잘 전달될 것이다. 그러면 합리적 이성이 하는 암시가 가능하기에 중독에 빠질 일도 적을 것이다.     

그러면 이성의 끊김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알아낸 방법은 집착하는 대상 말고 다른 매력적인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무의식은 생존의 본능이나 행복해지고 싶은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욕구를 느끼게 한다. 가령, 우리 몸에서 단백질이 필요하면 고기가 먹고 싶다라는 욕구가 생긴다.     


그런데 무의식이 항상 바람직한 선택만 하는 것이 아니다. 화학조미료가 첨가된 자극적인 음식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음식이 몸에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 재료 본연의 맛에서 또한 다른 맛을 추구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자극적이고 가시적인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무의식을 만족시켰다면, 더 효율적으로 무의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현재 시점에서 오는 행복감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높은 성적을 기대함으로써 공부를 더 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런 가시적인 것 말고 현재에 내가 노트에 필기를 예쁘게 한다든가(최근에 영상 편집을 배우기 위한 과정에서 유튜브 영상을 참고했는데 시청하는 동안 묘한 몰입감을 느꼈다.) 등 목표로 가는 과정에서 색다른 묘미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을 대상b라고 방금 이름 붙였다.)      


이렇게 현재가 주는 만족을 느끼면 이성이 유지되고, 이성의 끊김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이때는 합리적인 이성이 주인으로 자리잡고, 그 이성이 우리 무의식에 세뇌를 하는 일도 용이하다고 했다.     


-관찰자 모드      


나는 이러한 상태를 ‘관찰자 모드’라고 이름 지었다. 합리적인 이상이 우리 무의식을 관찰하면서 필요한 것을 보충해 주고 더 좋은 선택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정리해보자, 세상은 2분법적이다. 결과나 미래를 쫓으면서, 압박감을 받으면서 사는 것과 관찰자 시점에서 현재가 주는 ‘새맛’을 느끼면서 사는 것. 우리는 두 번째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모든 일이 잘 된다.     


만약 우리가 그 ‘새맛’을 원한다면 수단과 목적이 바뀐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시험 1등보다는 노트에 예쁘게 필기하는 과정이, 성공보다는 지금 이 수간이 중요해질 것이다. 현재에 집중할 때 미래는 더 빛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초감각을 무시하고 있지만, 우리가 그 마약보다 진한 맛을 알고, 거기에 맛들려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노력이란 것을 하게 된다면, 오로지 그 느낌만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저스트 두 잇’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방식이 쉽지 않다. 영화 ‘인셉션’에서 팽이가 돌아가는 것으로 현실과 꿈을 구분하듯이, 우선 내가 현재를 미래의 가시적인 어떤 것보다 더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 척만 하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팽이 말고, 내가 쓰고 있는 글씨체가 삐뚤해지고 있다면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나는 ‘새맛’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아는 척만 했다. 공시생 시절, 공황장애 때문에 공부를 못 했던 기간이 있었다. 이때 사실 공부가 무지 하고 싶었음에도, 공부만 하려고 하면 불안이 와서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그때 억지로 마음의 평화를 좋아하는 척 명상하고, 산책하고, 잠시 압박감을 내려놓으려 바다도 놀러 갔다. 그때 솔직히 명상하는 것이 귀찮았고, 그저 시험에 합격하고 싶은 마음(상常에 사로잡혀 있었다)뿐이었지만 명상을 좋아하는 시늉을 한 것 같다.     


그리고 자극적이고 가시적인 것에 현혹되지 않기가 어렵다. 옛날에 유행했던 애니팡 게임에서 동물들이 연속으로 빠바방 터질 때, 그 짜릿한 장면을 보면 점수가 늘지 않는다. 그 시간에 다음 수를 생각해야 실력이 는다. 원래 이 게임이 팡 소리와 함께 터지는 걸 쳐다보면서 속이 후련한 쾌감이 있는데 실력자가 되려면 그걸 못하니 아쉽다.     


그런 면에서 내가 좋아하는 여자도 허상이다.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집착한다고 해서 가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애니팡처럼 쳐다보면 성과가 없고, 보지 않으면 오히려 성과를 이룬다. 아이러니다. 집착하는 시간에 현재에 만족할 만한 일(대상b)에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그 상대방을 위해서도 더 좋은 일이다. 정말 아쉽지만 세상에는 허상이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대신 그녀의 존재는 현재의 좋은 느낌을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그녀로 인해 혼란스럽지만 그녀를 버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현재의 시점에서 그녀가 주는 행복과 집착할 때 느끼는 행복은 다르다. 탄소와 다이아몬드가 화학식이 같지만 원자 배열구조가 달라서 전혀 다른 물질이 된 것처럼 그 둘도 비슷할 것 같지만 완전 다르다.     

사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행복은 ‘토요일’과 같은 행복이다. 내가 초딩 때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을 가는 길은 행복했다. 이유는 내일이 마음껏 놀 수 있는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일요일이 되면 생각만큼 기쁘지 않았다. 이것은 일요일은 행복한 토요일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란 것이다.         

  

 -관찰자모드 강화 (미래부정 & 현재부정)     


그렇다면 이제 이성이 기능하는 관찰자모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관찰자모드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관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첫째는 미래를 부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의무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아무런 의무가 없다고 생각할 때 현재에 더 잘 녹아든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관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이성의 끊김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 일어났던 과정에서 불안(압박감)과 (미래 시점) 대상에 대한 집착 현상이 나타났던 것을 생각해보면 현재를 중시하는 미래 부정과 압박감을 해소하는 의무 부정을 추구한다는 것이 이해가 간다. 여기서 감사함의 역할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어쩌면 감사함이란 압박하는 작용과 미래에 집착하게 하는 반대작용이 아닐까. (감사함의 반대말은 압박감?) 뭘 더 하지 않아도 지금도 “충분히 괜찮다‘가 감사함의 본질 일 수도 있다.      


그런데 현재를 부정하는 것과 의무를 부정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압박감과 미래에 대한 집착은 우리도 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무의식에 자연스럽게 침투해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常)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과거 돈이 없을 때에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공장 같은 데 가서 일하면 인생 실패자가 되는 것처럼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다. 세상에 좋은 직업과 안 좋은 직업이 어딨나, 그것을 구별 짓는 것 자체가 상에 사로잡혀 있던 것. 세상에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없다. 다 좋은 일이다. 이런 원리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의무부정과 현재부정이 되려면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잡고 있던 상(고정관념)을 계속해서 없애야 한다.      


-상(常), 모든 부정성의 원류      


상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하면 거대한 고정관념으로서, 수학공식과 같이 무의식의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부처가 어릴 적 벌레가 새에게 잡아 먹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상이다. 왜냐하면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그냥 조건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일 뿐이다. 벌레가 아프겠구나하는 것은 우리의 상에 불과하다. 그저 순수한 자연의 섭리이다.      


사실 상은 모든 부정성이 시작되는 원류이다. 왜냐하면 원래 현재의 세상은 호기심이 저절로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고 행복한 느낌이 충만한 상태이다. 그런데 여러 가지 상(선과 악, 미와 추, 우등과 열등, 보수와 진보, 일등과 꼴등..)이 생김에 따라 그 본래의 순수함이 소실된다. 그래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원래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탐구나 배움이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의심하고, 잘하지 못하면 안 하는 것이 낫다라는 생각 때문에 포기하고 만다. 이 나이에 영어 공부라고 말이 돼? 하면서 포기하는 것이다. 망신당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낫다는 식이다. 그런데 세상에 상이 없고 무상이라는 것을 알면 모든 순간, 모든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다.      


-무아(無我)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상황들은 다 저마다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설(因緣說)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 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 나중에 안 좋은 일이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좋은 일이 안 좋은 일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절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판단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이처럼 인간이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는 진리를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라고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깨달음이다.      


알퐁스도데의 소설 ‘별’에서 순수한 목동과 주인집 딸이 무수한 별들이 쏟아지는 밤에 나란 히 앉아 있는 것은 복잡한 이유들이 빚어낸 공통분모가 눈앞에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상황이나 미래를 통제하려고 하기 보다는 우연적으로 허락된 이 순간에 감사하고, 몰입하면 된다.      


결과적으로 감사일기나 마음일기가 우선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의식이 끊기지 않은 상태에서 내 이성과 합리성은 무의식의 소원을 지속적으로 들어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과연 지금 현재에 집중하고 있는지, 상에 사로잡혀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계속해서 단속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현재를 위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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