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창 힘들 때 나를 떠나간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내가 공무원 시험 치기 며칠 전에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내게 실토했다. 난 시험 범위도 정리해야 하고 마음의 준비도 해야 했는데 그 사실을 감당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 사건 자체가 내겐 엄청 큰 트라우마가 되었던 것 같다. 왜 꼭 그때 여야 했을까? 그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었다. 시험도 망쳤다. 나는 내 안의 그 울분을 혼자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문자로 그 아이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녀가 내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해주면 내 마음이 조금은 괜찮을 것 같았다.
그녀는 끝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기는 잘못한 게 없다고 하였다. (1년 뒤 그녀가 결혼하기 직전 그동안 내게 미안했다고 문자가 왔다) 나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며 이해를 못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나고 그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보니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사실 그녀도 그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집안 형편도 안 좋았고 돈이 없어 이사도 가고 그랬다. 직장에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뭔가 좀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당시의 나는 능력도 비전도 없었다. 그녀는 분명 다른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시험 치기 전에 그런 말한 것도 뭐 그럴 수 있다. 난 몇 년째 시험 준비 중이었고 예민했다. 그녀는 지쳤고 내 디테일한 상황도 감지하기 힘들었다. 사과를 안 했던 것도 그 애가 자존심이 세어서 그런 거였고 예상을 못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느 순간 이 세상에 이해 못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신념이나 의지 같은 것도 엄청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심리학을 통해 알았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나 역사에 맞게 유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누군가에게 화낼 일도 없다. 남들이 엄청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그 내면이 복잡하다고 생각하면 나만 힘들다. 그냥 사람들이 최대한 단순하고 상황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로봇이라 생각하면 나도 마음이 편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화가 난 것은 그 사람의 배경을 이해 못하는 내 잘못이다. 그런 시도를 안 해서 그렇지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라도 쉽게 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단순했으면 좋겠다.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면 항상 이런 말을 한다. “아프면 약 먹으면 됩니다” 간단 명료하다. 그 말이 묘하게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어쩌면 내가 세상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서 내 마음이 아픈 것일 수도 있다. 스키너가 추구한 이상 세계는 조건 반사를 이용하여 모든 사람들을 착한 로봇군단처럼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가장 행복했을 때는 가장 어렸을 때 아닌가? 그때는 인생이 가장 단조로웠다. 먹고 자고 놀고 또 놀고 그게 다다. 행복을 지금처럼 수백 권의 책을 파면서 찾지 않아도 생각 없던 그때가 행복했다. 난 지금도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또 드라마를 봐도 진짜 재미있는 건 단순하다. ‘꽃보다 남자’ 이런 드라마 봐라. 진짜 유치한데 그걸 보면 마냥 행복하다. 나는 이렇게 우리 사는 세상이 획일적이고 단순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