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에게 문자를 또 보냈다. 내 삶에 90을 차지하던 아이였다. 7년을 친구처럼 지냈는데 내 잘못으로 한 순간에 연락을 끊어버렸다. 내가 아무리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도 소용없었다. 일방적으로 차단당한 기분이 이렇게 비참할지 몰랐다. ‘어떻게 한 번의 기회를 안 주지?’ 난 정말 그녀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그녀가 내 용서를 받아준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그녀의 음성을 듣고 싶었다.
답장이 왔다. “선배 이제 진짜 안 그럴 거가?” 그 순간 나는 미칠 듯이 기뻤다. “당연하지! 앞으로 네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다할게! 한 번만 더 그러면 난 사람 아니다.” 그녀는 “선배 미안.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마음 고생한 거 일시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너 없는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어. 다 이야기해줄게. 지금 당장 만나자. 만나서 얘기하자!” 그런데 그녀가 답이 없었다.
이런 젠장, 꿈이었다. 그래 ㅇㅇ가 날 용서할 리 없다. 아 정말 생생했는데 이렇게 허무할 수가. 마음이 너무 아프다. 세진님이 그러는데 이런 꿈을 ‘아시발꿈’이라고 한단다.
가끔 내가 지금처럼 멀쩡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몇 년 동안이나 분신처럼 가까웠던 이들이 한 순간에 내 곁을 매정하게 떠났다. 그동안 아주 긴 시간을 공무원 수험 생활의 짙은 무기력 속에 보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안을 막연하게 기어 다녔다.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아무도 내게 답을 주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공백도 지독한 우울로 바로 연결되었다. 눈을 감으면 마지막 시험에서 2 문제 고친 것이 아른거렸다. 그때 ~하지 않았더라면.. 과거 한 치의 잘못들이 나를 언제까지나 구속했다. 두 사람이 죽었다. 나와 나이가 똑 같은 엄마 친구 아들들이다. 한 명은 자살, 한 명은 암이었다. 그 사건들이 엄마에겐 큰 충격이었나 보다. 그 이후 엄마는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조르지 않았다. 그저 매 끼 밥을 챙겨주고 내 방을 청소하였다. 이 세상을 버텨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땐 정말 심각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만 했다. 우선 공무원 시험을 미련 없이 포기했다. 독서클럽에 가입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블로그도 시작했다. 내게 생긴 큰 구멍들을 메워줄 뭔가가 필요했다. 온, 오프라인 모임을 만들어갔다.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는 약간 긴장이 되었고 우울은 잠시 주춤했다. 더 용기 내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번호를 물어보고 커피를 마시자고 하였다. 약간 미친 척하고 생존에만 몰두하였다. 내 의식이 우울할 틈을 주지 않기로 하였다. 내 행동은 항상 생각보다 빨랐다. 그것이 내 유일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통했다. 이렇게 2년을 거칠게 움직이다 보니 두 여인의 기억이 희미해졌다. 독서클럽, 글쓰기 모임, 참새 카톡방, 블로그 이웃들이 이제 내 70 정도는 파고 들었다. 이제야 겨우 숨이 쉬어진다. 나 이제 살았구나! 그래 앞으로 100년은 더 살 수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