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

by 참새

공황이 오기 전까진 공황을 알 수 없다. 앞이 캄캄하고 죽을 것 같은 느낌. 말로 표현하면 이 정도인데 그 실제적인 느낌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나는 공황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착시 현상 속에 살아본 경험이 있다. 공황이 오면 ‘아 이제 죽는구나!’ 했었는데 죽지 않았다. 그때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을 때 드는 어떤 스릴감, 쾌감 같은 것들이 내 몸을 스쳤다. 그 느낌도 공황과 마찬가지로 처음 겪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 번도 시간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삶이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지막이 오기 전까지 마지막을 인식 못한다. 소중한 사람과 물건이 없어지고 나서야 그 존재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비로소 깨닫는다. 오늘이 삶에서 마지막 날일 때 그 절박함을 알지 못한다. 시한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하루의 시간을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 새로운 느낌은 미래를 부정하고 시간의 제한을 인지할 때에만 왔다. 이 세상에는 짐작만으로 알 수 없는 느낌들이 너무 많다.


극과 극은 서로 연결된다. 그 강렬했던 죽음의 기억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삶의 의지를 깨우쳐주었다. 공황이 쓰나미처럼 지나간 자리엔 새로운 꽃이 피어났다. 늘 곁에 있기에 평범한 눈으로 바라봤던 일상들이 아주 천천히 선명하고 특별하게 내 모든 감각을 파고 들었다. 물기 어린 시멘트 바닥, 길을 비추는 은은한 조명, 아침 햇살, 시원한 공기, 잔잔한 음악 소리, 쌩쌩 부는 바람까지 그 모든 것들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 이 세상은 천국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 이런 느낌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멈추고, 생각이 멈추는 곳에 열반이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공황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부럽기도 했지만, 이 환상적인 열반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선물들을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다. 꼭 공황 경험이 없더라도 간단한 명상만으로도 그 열반 경험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인데 말이다.


내가 열반을 경험하고 보니깐 삶의 해답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열반에 다 있었다. 열반은 나를 평화롭게 했고 날 협박했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열반은 내 눈 앞에 어떤 의무도 무력화시켰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도 깨끗하게 사라지게 하는 마법이었다.


지나치게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의 해결을 복잡한 논리나 외부적인 환경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걱정의 해결은 열반에 있다. 일단 열반을 느끼고 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지금 내 마음이 평화로우면 명백한 걱정이 몰려와도 그것은 더 이상 걱정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연인들이 서로의 매력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의 객관적인 조건이나 나쁜 성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다. 생각이나 걱정 따위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그 황홀한 느낌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의 분별력으로는 열반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열반이 우리 삶의 목적이고, 지금 우리 가까이에 있고, 조금만 노력하면 그것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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