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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새 Jan 19. 2016

너와 나의 벽을 허물다

나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무척 이기적인 아이였다. 내가 잘난 맛에 살았다.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한 조연이라 생각했다. 그 당시 작가가 되고 싶은 한 친구가 자신이 공책에 쓴 수필을 가지고 내게 왔다. 나는 그 글을 귀찮은 듯이 대충 읽고선 “이건 많이 부족해” 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 수필을 내가 보는 앞에서 차가운 표정으로 찢어버렸다. 그리고 오랫동안 우리는 서먹해졌다.



남의 시선에서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은 사실 참 힘든 일이다. 내가 아닌, 너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해서 들어야 하고 내가 아닌, 너가 힘들었고 슬펐던 일들을 이해해야 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나는 한번도 친구의 노력이나 용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혹시 내가 그 친구의 꿈을 짓밟은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도 죄책감이 든다.


20대에 여자들을 사귀면서 나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난 그녀들의 사랑이 필요했고 그녀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뭘 먹고 싶은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가 늘 신경 쓰였다. 그녀가 웃어야 내가 비로소 마음이 놓이고 행복해졌다. 라캉은 ‘(내)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실감났다. 그녀들이 좋아하는 팝송, 영화들을 나도 원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녀들이 다 떠나고 내겐 꿀리지 않는 문화적 소양과 지나치게 남 눈치 보는 버릇이 남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 연애는 ‘내’가 아닌 ‘너’를 이해하는 좋은 경험이었다.


요즘 나는 인간성이 더 업그레이드 되어 리액션 하는 것이 즐거움 중에 하나가 되었다. 만약 누군가 ‘하루 종일 아팠다’고 한다면 그 하루가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3초 정도 생각해본다. 그러면 그 마음과 내 마음이 연결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그들의 자랑을 섬세하게 알아차리려 노력한다. 그 사람도 모르는 그의 장점을 내가 최대한 밝혀낼 때, 그는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너가 행복하면 나도 진심으로 행복하게 되는 경지에도 이른다.



진정한 공감은 타인에 대한 이해를 넘어 훨씬 더 큰 희생과 타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까지도 포함한다.


영화 페이스 오프에서 꼰대 같은 FBI요원 숀 아처(존 트라볼타)는 사춘기 딸과 대화가 단절되어 있다. 그녀가 학교에서 탈선을 하고 거친 친구들을 사귀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절대 이해할 수도 없다. 계속해서 자신의 시선으로만 딸을 바라보고 무엇을 강요한다. 이 둘의 벽은 높아져 간다. 그러다 캐스터(니콜라스 케이지)가 숀 아처의 얼굴을 하게 되자 딸을 귀찮게 하는 남자친구를 때려 눕히고, 칼로 남자를 찌르는 법을 가르쳐준다. 최소한 그때 우리의 속은 후련해졌다. 왜냐하면 그때 아빠는 (외형상으로는) 자신의 방식을 버리고 딸의 언어로 그녀와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영화 패치아담스 中)



10년 전에 본 영화 ‘패치 아담스’에서 정신병원에 있는 어떤 할머니는 국수에서 헤엄치고 싶다고 말한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아무도 할머니 말에 대꾸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 패치 아담스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대형국수를 만들어 할머니가 그 안에서 헤엄치게 만든다. 그 후 할머니의 증상이 좋아진다.


나는 이 영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화라고 하는데, 어떻게 저런 환자들의 헛소리를 다 들어줄 수 있을까? 그리고 저렇게 해서 환자가 정말 치료가 되는 걸까? 칼 로저스의 책 ‘사람중심상담’을 읽으면서 나는 그 가능성을 찾았다. 책에서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자신들이 이해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더 이상 정신분열 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정신분열증 환자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놀라울 정도로 관심이 없다. 우리에겐 단절이 만연되어 있다. 나는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각자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의미 없는 육성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권위와 기준으로, 자기 이야기만 할 뿐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절망적인 소외감을 느끼고 이 세상과의 높은 ‘벽’을 확인한다. 그 벽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더 이상한 말을 지어내게 된다. 알코올릭이 세상을 등지고 술에 더 빠져드는 이유도 어쩌면 세상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아무도 자신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점점 미치게 된단다.


어느 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ㅇㅇ님이 내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녀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를 엄마에게 빼앗겨 슬퍼했다. 난 그녀가 고양이에 집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개인적으로 고양이를 싫어한다. 그리고 그녀가 고양이에 집착하는 것이 그녀의 어려운 인간관계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드니깐 예쁘고 자기 말 잘 듣는 고양이에 집착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고양이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녀는 새로운 고양이를 얻게 되었고, 그제서야 그녀만의 세계에서 고양이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게 되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내 가치관의 개입 없이 오로지 그녀가 원하는 것을 향하게 하는 것이 좋은 상담이었겠구나! 그녀에게 어떤 것도 강요하거나 비판하면 안 되겠구나! 그녀의 개성 있는 존재자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것이 그녀와 나의 관계를 위해서도 좋겠구나!’


영화 속의 패치 아담스도 환자들의 이야기를 그 자신이 아닌, 타인의 기준에서 들어주고 공감해준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행복을 되찾고 점점 사회에 적응하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 자체의 타당성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의(내 기준에서 유치하고 헛소리에 가까울 수 있는) 어떤 말이라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영화를 본 지 10년 만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칼 로저스는 '사람중심상담'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깊이 들어주고 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거의 항상 눈물을 흘립니다. 나는 그들이 사실은 기뻐서 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아 이제 살았다! 누군가가 나를 들어주네. 누군가 나를 제대로 알아주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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