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 2때 내가 속한 마산, 창원 문학동아리연합회 공금을 횡령했다. 그 당시 나는 총무로서 100명이 넘는 회원들의 회비를 관리했다. 통장의 자세한 내역을 알 수 있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연말에 선배들이 통장 검사를 하지만 나를 신뢰했기에 그 중간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 돈을 내가 꼭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쓰고 나중에 용돈을 받으면 채워 넣었다. 친구가 급전이 필요하다고 할 때도 나는 공금에 손을 대었다.
연말이 다가오자 내가 동아리 통장에서 마이너스 돈을 계산해보니 총 13만원이었다. 나는 그 돈을 도저히 메꿀 수 가 없었다. (이것까지는 생각 못했다) 엄마한테 솔직하게 이 사실을 말하고, 엄청 혼나고, 엄마는 내가 썼던 돈을 메꿔주었다. 그렇게 그 사건은 그냥 넘어갔다.
어렸음에도 그렇게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당시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 책에서 동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결단력 있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결과에 문제가 없으면 그 과정쯤이야 쿨하게 넘겼다. 원래 새가슴이었던 나는 인생에서 그런 과감성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삶에 마키아벨리의 효율성이 파고들었다. 공익시절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서류를 잘 만들었다. 여러 문제들을 일단 먼저 진행시키고 뒤처리는 나중에 했다. 나는 빠른 일처리로 칭찬을 많이 들었다. 사회복지사로 취업하고 나서도 겉으로 번지르한 사업계획서를 곧잘 만들었다. 같은 내용이라도 내가 만들면 있어 보였다. 난 잔머리가 잘 돌아갔다. 가끔 대표님도 내 가라실력에 경악하곤 했다.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운명의 신은 여성이기에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싶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中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였다. 복잡한 내역을 생략하거나 정확하지 못한 근거로 다시 일을 해야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들은 예산이 이미 집행되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했다. 내가 수습 못하면 (나는 또 다른 효율적인 사업을 진행해야했기 때문에)윗선에서 나서서 자잘한 것들을 수습했다. 내가 큰 사업비를 따 내었고 그로 인해 우리 단체도 큰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그들도 과정 상의 잘못을 묵인하였다.
나는 이것이 벤담이 말한 ‘공리주의’와도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내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기이기도 하지만, 내 친구나 동료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더 극적이고, 더 큰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이나 절차상의 문제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원래 이 세상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이나 결과에 더 쉽게 흔들린다.
작년 독서 동아리 사업도 그렇고 지금까지 참새 사업을 잘 이끌 수 있었던 것도 내게 이런 효율적인 마인드가 어느 정도 작용한 것 같다. 물론 나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나이가 들수록 되도록 정직하고 절차를 우선시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공리주의의 그 효율성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고 한다. 솔직히 그가 경제 성장을 이끌었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의도는 있었던 것 같다. 당시는 독재였고 독재가 가진 효율성으로 경제가 빨리 발전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당시에 박정희 독재가 없었다면 비약적인 경제발전이 없었다고 치자. 그러면 수많은 경제 혜택을 받은 자들이 박정희가 독재를 했다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박정희는 (개인적 권력욕도 있었겠지만) 진심으로 대한민국의 렙업을 위해서 일말의 노력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영화 대부에서 돈 꼴레오레는 미국 마피아 중 가장 큰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마피아 계의 맏형이었다. 그는 조직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고, 또 그만한 역량도 있었다. 그러다 한 조직의 도발로 마피아계의 평화가 깨지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일어났다.
돈 꼴레오레가 죽고 똑똑한 아들 마이클 꼴레오레가 그 자리를 잇지만 아무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이클은 다른 마피아 수장들에게 아빠의 많은 이권을 내려놓고 그냥 자신은 조용히 살겠으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그들을 안심시키고 마이클은 아빠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그들을 일시에 속임수를 써서 다 죽여버린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꼴레오레가는 옛 명성을 되찾았다. 그는 다시 미국 마피아계를 평화로 이끌었다. 마이클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차피 이 세상은 정의롭지 않아.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니지. 내가 만약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그들은 더 큰 혼란을 가져올거야. 또 서로 죽고 죽이겠지. 심지어 나를 죽일 지도 모르지. 그나마 똑똑하고 능력 있는 내가 나서서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 전체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거야. 지금 이 선택은 내 욕심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이다. 이 세상은 어차피 최선과 차선을 고르는 것이 아니다. 나쁜 것과 덜 나쁜 것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일 뿐(군주론 中)이다.
사람들이 현상의 외양이나 결과에 더 크게 흔들린다는 증거는 많다. 그 중에 사람들이 외모에 쉽게 동요된다는 측면도 있다. 마키아벨리도 사람들이 일의 ‘결과’를 보는 것과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것이 연결된다고 한다. 솔직히 우리는 못생긴 사람에게 가혹하고 예쁜 사람에게 관대하고 호의적이다. 예쁜 사람은 큰 노력 없이도 취업이 잘된다. 이런 사실이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이 원래 공평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외모뿐만 아니라 능력에 비례해서도 우정이 재단된다. 그저 진정한 친구라서 친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게임을 잘하고, 공부를 잘하고, 돈이 많고, 인기가 좋아서 우정이 더 돈독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잘 돼야 친구도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마냥 순수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결과나 외양을 중시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세상을 비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할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못생긴 사람은 조금이라도 예뻐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고, 착하지만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객관적 스펙을 갖춰야 할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세상 속 마이클 꼴레오레가 그랬던 것처럼 ‘덜 나쁜 것’을 선택함으로써 내게 주어진 것이라도 지켜내고 챙기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결과나 외양이 우리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예쁜 사람은 행복할 확률이 높은 것이지, 전부 행복하지는 않다. 못 생겨도 행복한 사람도 있긴 있다. 일의 결과에도 초연하고 과정을 똑바로 응시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결과나 외양을 넘어선 어떤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 내 행복이 내가 지닌 우성 유전자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상적인 이야기 같지만 우리도 이런 성숙한 태도를 가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