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난하면 안 되나!
가난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가난은 죄라고 생각했다.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창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가난은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고등학교 입학금을 내지 못하여,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2 년을 숨어 다녔다.
3 학년이 되니 ‘대여장학금 제도’가 생겨 그 돈으로 입학금을 납부했다.
밀린 돈을 갚고 나니 속이 후련하고, 떳떳한 학생이 되어, 선생님을 만나도 친구를 만나도 당당하게 활보할 수가 있었다.
어느 날 중학교 여자 동창생을 길거리에서 만났다.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자기 집에 가서 좀 놀다 가라고 한다. 엉겁결에 그러자고 대답을 하고 집에 갔는데 방에 들어가기가 겁난다. 운동화를 벗으면 새까만 흙먼지 발인데, 창피해서 이걸 어쩐담. 마침 마룻가에 물걸레가 있어 흙발을 대충 닦고 방에 들어갔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구멍 난 운동화를 신고 다녀, 발은 언제나 먼지 투성이고, 하복은 일주일 내 내 입고 다녀야 하니 늘 꾀죄죄했다. 남들은 번쩍번쩍하는 워커를 신고, 주름 잡힌 교복을 입고도 부족하여, 교모를 찢어서 재통 틀로 다시 박아, 나름대로 마음껏 멋 내고 다니는데 언제나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싫었고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부자가 되어, 마음껏 돈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
3 학년 겨울방학이 되자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집집을 돌며 집에서 하루씩 먹고 자며 앞날을 이야기하는 날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우리 마을에 왔는데 나는 그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방죽 있잖니? 여기에다 이다음에 황금을 가득 채울 거야! 그러니 너희들, 내 이름을 앞으로는 ‘지금’ (池金, 금으로 만든 연못이라는 뜻)이라고 불러 줄래? 그 후로 나의 호는 ‘지금’이라고 불리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 월급을 받아도 역시 가난은 못 면한다. 여자 친구를 만나 폼 나게 한번 대접하고 싶어도 언제나 나의 포켓은 빈털터리다. 그렇다고 내가 풍덩풍덩 헤프게 써서, 돈이 없는 게 아니다. 언제나 쫌뺑이처럼 사는데도 늘 그 꼴이다. 하루는 가장 친했던 직장 친구 수천이를 만나 서로의 처지와 희망을 안주삼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글쎄, 깊이 생각은 안 해 봤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뭔가 좀 색 다른 것을 해 봐야지.
야! 우리 서른세 살까지만 부지런히 돈을 모으자. 그리고 그 돈으로 사업을 하는 거야.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 월급쟁이로는 틀린 거 같아.
서로는 얼큰하게 취하도록 마시며, 밤늦게까지 앞으로의 포부를 이야기하다가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아쉬운 이별을 했다.
이렇게 하여 ‘가난’은 나의 화두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풍요롭게 살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여유 있는 사람이 될까?
책을 뒤적이고,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담소해보고, 여러 사람의 경험담도 들어 봤다.
그렇게 살면서 약속했던 서른세 살 도 넘겨 버리고, 40을 맞았다.
마흔두 살에, 다니 던 직장에서 마저 잘렸다. 애들이 넷, 초 중 고 대학생.
돈은 있어도, 있어도, 부족한데 직장마저 잘렸으니, 앞길이 깜깜하다.
퇴직금은 투자한답시고 친구에게 빌려 줬는데, 그것도 절반이나 떼이고,
어렵사리 친지들의 도움으로 3인 회사를 차려서 막 시작했는데,
전 직장 노사문제로 구치소에 들어와 차디 찬 마룻바닥에 누워 천정을 바라보며, 한숨만 짓고 있구나. 처량하고 불쌍한, 내 신세여!
나는 왜 가난을 벗어나지를 못하는가!
가난은 하지만, 가난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다.
물속에 빠졌는데, 마실 물이 없구나!
가난이 무엇인가?
무엇을 가난이라고 하는가?
자연은 풍요롭다고 하는데, 자연 속의 나는 ‘왜’ 가난한가?
원래 자연에는 풍요롭고 가난함이 없다.
자연의 하나하나는, 모두가 가난한 것이다.
가난한 하나하나지만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면, 우리는 그것을 보고 풍요롭다고 한다.
이때의 가난은, 철두철미 하게 가난해야 한다.
마치 성공적인 오케스트라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연주자가 한 사람의 지휘 아래, 일사 불난 하게, 나를 앞 세우지 않고 무심히 연주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처럼.
개인 하나하나는 자기의 맡은 바 임무에 철두철미하게 철저해야 한다.
그것뿐이다.
그러면 풍요는 내 뜻과는 관계없이 그냥 이루어진다.
연주자인 내 뜻과 오케스트라의 성공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다.
성공이 되든, 안되든,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하고, 언제나 바른 연주가 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을 뿐, 어떤 권한도 없다. 괜스레 연주하는 내가 오케스트라를 걱정하는 것은 쓸 데 없는 헛 걱정이다. 지금 나의 입장은 지금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조금 주고 많이 받으려고 한다.
아니, 안 주고받으려고 한다.
노력은 조금밖에 안 하고, 승진은 남보다 빨리 하기를 바란다.
싸게 만들어서 비싸게 팔려고 한다.
이것이 아직까지의 나의 모습이었다.
철두철미하게 가난하지 못하고 말로만, 그리고 마음으로만 가난했다.
어린냥 섞인 투정 밖에 모르는 가난이다.
내가 주고, 죽고, 섬기는 ‘철두철미한 가난’이 되어야 한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말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대의 것이다”
‘철두철미한 가난’이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도움으로 내가 살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나 혼자만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가난한 것이다.
혼자인 나지만, 서로 주고받고 어울림으로써 우리는 “풍요로움”을 얻게 된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해주면, 상대로 부터도 나에게 필요한 것이 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서비스 정신”이다.
물건을 팔 때에도 이익이 많은 것 만을 팔려고 하면 안 된다.
상대가 꼭 필요로 하는 것을 팔아야 한다. 그러면 그 손님이 ‘마진이 많은 물건’도 사 줌으로써 나도 번창하게 된다. 상인과 나는 입장이 다르지만 한 배에 타고 있는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가난해야 한다.
가난해 봐야 비로소 가난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알게 하려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난을 주신 것이다.
가난을 알아야 풍요로울 수 있다.
가난을 모르는 풍요는 사치요, 뽐냄이다.
존경을 받지 못하는 풍요는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되고 만다.
당당하게 가난하고 싶다.
심령이 가난하여 상대에게 양보하고,
상대방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그런 여유 있는 사람이고 싶다.
자연은 스스로가 가난하고, 뽐내지 않기 때문에,
서로가 어우러져 끝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우리도 자연처럼 서로 어울려
富(부)를 창출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相生(상생)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