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당신이 됩니다

by 왕신 송화웅

2. 소주 한 잔의 행복

나는 부라쉬-롤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자동차나 철강회사에 납품을 하고 있다. 물론 부직포-롤이나 세라믹-롤이 우리의 주상품이기는 하지만 부라쉬-롤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어떤 상품에 비해 크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자동차 제조기술이나, 철강의 기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30여 년 전만 해도 그리 자랑할만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었다. 철강 회사에서 22년을 근무하다가 해고되면서, 먹고살기 위해 일을 시작한 것이 부라쉬-롤 제조업이었다.

철판 표면에 묻은 오염을 제거하기 위해 부라쉬-롤은 필수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폴리 푸로필렌(PP)이라는 화학사(化學絲)를 이용한 부라쉬-롤은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철판에 부착된 스케일이나 오일-스테인 등은 제거할 수가 없어서 강력한 효과가 있는 “강력 부라쉬-롤”이 꼭 필요한 실정이었다. 그러나 필요를 느끼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만들지를 못했기 때문에, 꼭 필요로 하는 업체에서는 수입품을 써야 했다. 나는 이것을 국산화하여 범용(汎用)토록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전문지식이 없는 ‘나’에게는 너무나 버겁은 일이었다. 자금이 넉넉한 것도 아니요,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요, 벤치-마킹할 만한 업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암중모색(暗中摸索)하여 Grit Brush Roll(실 안에 돌가루가 함유한 부라쉬-롤)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부라쉬- 사(絲)를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미국, 일본, 독일에는 이미 상품화되었지만 우리가 수입하여 쓰기에는 너무나 비싸서 범용으로 쓸 수가 없었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한국 금속(주)”에서 수입품 Grit Brush Roll을 쓰고 있었고, 관계회사인 “유천 산업사”에서 국산화하기 위해 시험을 하고 있는 정도였다.

나는 무모하게도 부라쉬-롤도 모르는 사람이 “Grit Brush Roll” 제작에 도전한 것이다. 중고 PP 압출기를 사다가 재활용되는 나이론 수지를 이용하여 SiO2(산화규소, 모래 모양 임)가 함유된 Grit Bristle(연마 부라쉬사) 압출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니 매일매일이 힘든 나날이었다.


매일 어려운 사투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속달 등기 ‘내용증명’ 한 통이 날아왔다.

내용을 보니, 한국금속의 자회사인 유천 산업사 대표가 보낸 “연마 부라쉬사 실용신안 통지”였다. 자기가 소유한 특허를 우리가 침해하고 있으니, 작업을 중단하라는 내용이었다. 작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특허 소송에 들어갈 것임을 미리 알리는 것이었다.

선진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특허가 나와 있었고, 그 특허에 의한 제품들이 국내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특허 침해라니 말도 안 되는 내용이다. Grit Bristle 제조 기술은 국제 특허임으로, 한국 특허청에서는 특허를 내주면 안 되는 사안이다. 그러나 이미 특허를 가지고 있다니, 어쩔 수 없이 특허싸움을 해서 상대방의 특허를 무효시키는 방법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말로는 간단하게 특허 싸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복잡하고 귀찮은 일이다. 세 명이 근무하는 작은 회사에서, 누가 이 일을 맡아해 줄 사람도 없고, 특허에 대한 전문지식이 라곤 전혀 없는 내가 한다고 해도, 처음 하는 싸움이라 두렵기도 했지만, 비용이 만만치가 않을 것 같았다. 변리사 비용, 사례비, 출장비 등 등, 그 특허싸움에 드는 비용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버겁었다. 그러나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싸워야 한다. 직접 서울에 올라가서 하나하나 해결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상대방 특허를 무효시키지 못하면 우리 사업은 접어야 한다. 사느냐 죽느냐가 이 싸움에 걸려 있는 중차대한, 한 판 승부다.

특허 싸움에는 어떤 변리사를 쓰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국제감각이 있는 변리사를 만나야 이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다.

수소문하여 김 00 전문 변리사를 찾아가 사건을 이야기하니, 친절하게 사건을 맡아준다. 착수금을 지불하고 긴 긴 특허 싸움이 시작되었다.

1988년 2월 1일 창업한 우리는 같은 해 5월 14일 실용신안 제28691, 28867의 특허 무효 소송을 시작하여, 다음 해인 1989년 1월 28일 특허 무효 심리 종결 처분되었다. 상대방의 특허는 무효가 된 것이다.

큰 기업체인 상대방은 무조건 결과에 불복하고, 항고했다. 큰 회사에서는 변리사 비용쯤은 문제가 아니다. 내용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것은 불문하고, 오로지 필요한 것은 이기는 것뿐이다. 경비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항고 역시 주문 대로, 원심결을 파기한다. 심판청구를 각하한다.로 특허청 항고 심판소 심결이 났다. 그러나 상대방은 항고심 역시 불복하고 상소하여 1991년 1월 10 대법원 판결,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특허청 항고 심판소에 환송한다. 는 판결을 얻음으로써 3년에 걸친 특허 소송은 끝이 났다.

이렇게, 나로서는 피나는 싸움을 해서 승소는 했지만, 달라지는 게 없다. 재판에 이겨봐야 패자인 특허 소지자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없다. 돈 몇 푼 내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가 패하면 부라쉬 업을 할 수가 없을뿐더러 상대가 입었다고 주장하는 손해를 다 변상해야 되기 때문에 영세한 우리 같은 곳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3심 모두 승소하여 상대방으로부터 소송비 일부를 변상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한 우리의 심적 피해는 너무나 컸다. 그러나 연마사 (Grit Bristle)를 마음 놓고 생산할 수 있어 부라쉬 롤을 업(業)으로 하려는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값진 승리였다. 그 후로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압출(壓出) 기술을 향상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새로운 가소제(可塑劑)를 찾아내고, 새로운 압출기를 설계하여 어느 제철소나, 어떤 금속에도 적합한 부라쉬-롤을 지금은 공급하고 있다.

더 좋은 상품을 제공하기 위하여 세계적인 부라쉬 메이커인, 호타니 사 (Hotani Co., Ltd) 와도 기술 협약을 하여 상호 기술 교류를 하고 있다. 명실상부한 그로발 부라쉬 업체로써 손색없는 제조를 하고 있다. 호타니 사(社)는 당시 Grit Bristle을 발명(發明)하여 일본 및 국제 특허를 가졌던 회사이니,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엉터리 특허로 인해 고생했던 지난날들이 우습기만 하다. 특허 출원자(出願者)나 이를 인정해 주는 특허청(特許廳)이나, 다 똑같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이다.

처음 부라쉬 롤을 시작하던 그때. 허허벌판에다 스레트 건물 하나 달랑 지어 놓고, 중고 압출기 하나 구입해다가, 제대로 뽑히지도 않는 실을 뽑는다고 크레인 씨 훅에다 실을 매달던, 소꿉장난 같던 때가 어제 일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압출기에서 나오는 열 가닥, 실의 길이가 모두 달라 여기저기 따로따로 얽어 매야 했던 일.

잘 나오던 실이 끊겨 압출기 헤드 밑에 수북이 쌓이던 일. 손가락 굵기만 한, 두 세줄의 실을 뽑던 일.... 실이 제대로 뽑히지 않아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나!

시간이 흘러 흘러 30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잠시 회상해 보았다. 특허 침해라고 하면서 특허 사본을 내용증명으로 우리에게 보냈던 유천 산업의 ‘서 00’이라는 사람은 지금 그 이름조차도 없다. 특허 소지자라고 했던 유 00 은, Grit Bristle을 소재로 하는 연마 부라쉬와는 전혀 무관(無關) 한 일을 하고 있다. 한국금속(주)의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세상은 참으로 요지경 속이다. 지나고 보니 꿈만 같고, 영화의 한 장면 같기만 하다.

지난 일을 푸념하는 나에게 소주라도 한 잔 하라면서, 아내가 잔을 내민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부라쉬-롤로 초지일관(初志一貫) 하는 당신이 그래도 참으로 장합니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국산화하려는 신념 하나가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한 것이니, 그 신념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당신을 엄지로 인정합니다.

아내가 따라준 소주잔에, 나는 입술을 대면서, 씁쓸히 웃는다.

미안해서 웃는가?

씁쓸해서 웃는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국산화를 해낸, 우리들 자신에 대한 자축의 술잔입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값진 술잔이며 행복한 순간입니까!

그동안 수고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더욱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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